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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데샹] 유년기의 자살(自殺) [커미션 작업물]

NickX 2020. 11. 26. 18:49

@Perdio_님 글 커미션 / 공미포 14,611자



한 해가 끝나간다.

달력이 바뀔 뿐인데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이유 없이 벅차오르곤 했다. 사계절이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그렇게 설레는 건지….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다가오는 12월. 또 그 끝자락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크리스마스. 동양에서 온 능력자들은 무슨 날이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대부분의 능력자들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하루 중 하나였다. 종교적인 이유는 둘째 치고도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었다.

미쉘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피터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터는 지금 미쉘의 부탁으로 지하연합에서 맡아주고 있었다. 그 지하연합은 매년 아무렇지도 않게 미쉘을 그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불우한 능력자가 많다는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서, 실제로도 연합의 능력자들도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들끼리 조촐하게 파티를 여는 게 연합의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연합 소속인 능력자 중에 멀쩡하게 가족이 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은 어쨌든 무시하고, 미쉘은 그 분위기를 좋아했다. 지하연합과의 관계나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피터를 그런 다정한 곳에 맡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쉘은 자신의 옆에 앉아 멍하니 벽난로를 보고 있는 소녀를 힐끔 훔쳐보았다. 며칠 전부터 미아는 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녀의 컨디션에 관한 게 아니었다. 미아는 요즘 자주 멍하니 있었다. 불러도 잘 듣지 못하고 그렇다고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미쉘은 다정히 말을 걸었다. 친구로서 그녀가 항상 걱정됐다.

“미아, 혹시 따로 약속 없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지하연합은 다들 좋은 사람들인 거 같아. 미쉘이 변명하듯 서둘러 덧붙였다.

“.......”

하지만 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쇼파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사실 미쉘은 미아가 왜 의기소침해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미아가 신경 쓰였다. 미쉘이 피터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미아도 오빠를 소중히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미쉘은 미아를 꼭 안아주었다.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어깨가 오늘따라 유달리 마음이 아팠다.

“어? 뭐야? 무슨 일이야?”

미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평소처럼 해맑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을 안은 미쉘을 팔을 마주 감싸 안았다.

“같이 지하 연합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갈래?

미쉘은 군말 없이 방금 전 했던 권유를 다시 미아에게 건넸다. 그러나 미아는 예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난 괜찮아.

“그래?”

“응.”

별다른 말을 더 얹지 않고 미쉘은 미아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다만 한 번 더 그녀를 끌어안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아의 활기찬 인사를 듣고, 미쉘은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섰다.

밖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화목한 가족들, 꺄르륵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게 뒤엉켜 행복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하연합에 가는 길에 미아는 피터에게 줄 선물을 하나 샀다. 피터가 요 근래 계속 조르던 거였다. 그리고 엽서를 두 개 샀다. 하나는 피터에게 썼고, 다른 하나는 까미유에게 보낼 거였다.

「미아가 외로워해. 빨리 와.」

용건만 간단하게 적은 엽서를 그 자리에서 바로 부쳤다.

가게 문을 열고 다시 거리로 돌아가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작년에는 까미유와 미아 셋이서 봤었는데…. 미쉘은 작년 겨울을 떠올렸다. 그런데 올해는 셋 다 따로따로 첫눈을 보게 됐네. 까미유가 있는 곳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미쉘은 잠시 그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미쉘이 보낸 엽서는 그로부터 이틀 뒤에,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끝난 다음 날에 도착했다. 까미유는 지금 고향에 와있었다. 고향…. 고향이라는 말에는 살짝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그는 그가 주워진 곳에 와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보내라며 고향의 어느 한 레스토랑의 주소를 남겼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침을 먹으며 여유롭게 미쉘의 엽서를 전달받았다. 짧은 내용을 읽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아가 제정신이 아닌 것도 당연하지. 주문한 블랙커피는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그 아이는 몇 년 전 오빠를 잃었다. 정확하게는 오빠를 잃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아이에게 가족이 중심이 되는 큰 명절은 쓸쓸한 기분을 남겨주는 법이었다.

비록 미아에게 오빠의 생사를 숨긴 건 까미유 본인이었지만, 그는 미쉘에게 정성껏 답장을 썼다. 아직 그녀들은 이용 가치가 충분했다. 그렇다면 정성 들여 관리하는 수밖에 없잖아.

 

「걱정 마. 일은 거의 다 끝났어. 여기는 눈이 오는데 거기는 어때? 곧 돌아갈게. 아마 이 답장과 비슷하게 도착할 거야.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돌아가면 셋이서 늦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

 

유려한 글씨체가 작은 종이 위를 빼곡하게 채웠다. 맨 끝에는 자신의 사인을 쓰고 그는 그 엽서를 레스토랑 오너에게 전달했다.

“잘 부탁해요.”

까미유가 웃으며 말하자 오너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맡겨달라 말했다. 까미유가 며칠 전 레스토랑 벽에 사인을 해준 뒤부터 그는 유독 까미유를 신을 보듯이 보곤 했다. 자신의 별 볼일 없는 레스토랑을 되살려줄 구세주 같은 걸로 보았다. 까미유는 그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회색 겨울 코트를 입은 그는 주위 사람들 보다 두 뼘은 더 커서 유독 돋보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 그를, 길거리의 여성들이 모두 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대놓고 그를 따라오며 힐끔힐끔 훔쳐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까미유는 그 모든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니,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인기척이 적은 길을 골라 걸었다. 으슥한 골목을 두어 번 돌자 정말로 주위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선글라스를 벗으며 멈춰 섰다.

그는 어느 창고 앞에 섰다. 중요한 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을 것처럼 작은 자물쇠가 유일한 잠금장치인 벽돌 창고였다. 손잡이에는 먼지가 새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창문 하나 없는 창고는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썩은 생선 비린내가 날 것만 같았다. 우연하게 누가 이곳을 발견해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을 것만 같은, 평범하고 평범한 창고였다.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그러자 녹슨 쇠가 끼이익 거리며 문이 열렸다. 그는 경계하며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본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오랫동안 방치해서인지 먼지가 가득했다. 그가 소매로 입을 막았다.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그의 발걸음 따라 먼지가 폴폴 피어올랐다. 벽을 더듬거려 스위치를 찾았다. 전구가 파르르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참을 느릿느릿 깜빡이다가 겨우 불이 들어왔다.

흐릿한 주홍빛 불빛에 비친 창고는 잡동사니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먼지로 뒤덮인 그 물건들은 모두 낡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벽면을 빙 둘러싼 서랍이 있었지만 그 서랍에 책은 몇 없고 상자들이 선반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는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작은 램프가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서랍과 마찬가지로 잡동사니로 가방 하나 놓을 곳이 없었다. 자그만 창고 안은 서랍과 책상으로 공간이 꽉 차있었다.

까미유는 발로 바닥에 쌓인 물건을 옆으로 쓱쓱 치우며 앞으로 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것들 중에 손에 잡히는 거 하나를 아무거나 집었다.

기억에도 없는 엽서였다.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이 프린트된 엽서는 미국에서 발송되었다는 우표가 붙어있었다. 까미유는 ‘P’라는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잠시 기억을 뒤져보다가 이내 누군지 깨달았다. 3학년 여름방학 때 동기가 보냈던 거였다.

 

「까미유.

잘 지내고 있어? 알다시피 나는 미국이야. 지금은 워싱턴인데 그전에는 어디에 있었게? 아니다, 이건 직접 보고 말해줄게. 내 무용담을 들으면 너도 평소처럼 침착하지 못할걸.

여기는 이탈리아와 전혀 달라! 뉴욕은 정말 사람이 다르더라. 높은 건물이 가득하고 사람의 활기가 느껴져. 에너지가 다르다고! 뭐, 근데 그만큼 사람 냄새는 전혀 안 나더라. 이질적인 분위기야.

그래서 너희는 지금 뭐하고 있어? 너는 또 그 히카르도란 친구랑 만났지? 이번 방학에는 틀어박혀서 공부만 한다고 했는데 그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 친구랑 어디 놀러 갔지? 어디로 갔어? 개학하고 만나서 이야기해 줘도 좋지만 궁금하니까 이왕이면 답장으로 써주라.

난 방학 마지막까지 미국에 있을 예정이야.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답장을 보낼 거면 라스베이거스의 A 호텔로 보내주라. 여행 마지막엔 여기 있을 예정이거든!

네 친구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꼭 답장 써줘. 알았지?

-미국에서 P가-」

 

쓸데없어…. 까미유는 그대로 엽서를 반절로 찢어 바닥에 버렸다.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긴 별 중요치 않은 동기 중 하나였다. 심지어 졸업 전에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가 빵집을 하겠다는 둥 어이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자였다.

방정맞은 성격도 마음에 안 들었다.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괜히 계속 치근덕거리던 애였다. 성적도 별 볼일 없었지만 집이 유복해서 곁에 뒀던 애였는데. 이용 가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당시에도 이 편지를 받고 짜증이 났었다. 지금은 덕분에 더 불쾌해졌다. 그때는 가벼운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금은 모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의 이름이 적힌 게 더더욱. 이때 답장을 뭐라 보냈더라? 까미유는 혀를 찼다.

창고는 이 편지처럼 까미유의 과거가 모여 있는 창고였다. 그럼에도 자물쇠 하나로 방치한 건 중요해 보이지 않으려고 위장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정도의 과거가 모였을 뿐이었다. 연구 기록 같은 건 엄중히 보관해놓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은 모든 루트를 폐기해놓았다. 이 창고는 그런 곳과는 달랐다. 딱 보기에도 중요해 보이진 않았고 실제로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모아놨었다.

창고 안은 까미유가 사용했다고 하기엔 답지 않게 전혀 정리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았다. 까미유는 이곳을 쓰레기통처럼 사용했었다. 버릴 수는 없지만 언젠가 아주 적은 확률로 다시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를 것들을 여기에다가 버리곤 했다.

가운데에 놓인 책상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에 파묻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까미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고 죄다 바닥에 버렸다. 먼지밖에 없던 바닥에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처음 보는 후배에게 받았던 선물 상자,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졸업앨범. 가치 없는 인물들과 나눈 편지와 일방적으로 받은 러브레터들…. 필요 없는 것은 등 뒤로 던져버리고 아직 연줄을 붙잡고 있을만한 소수의 인물들의 물건은 가져온 가방 안에 넣어 보관했다.

큰 가방도 아닌데 가방 안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에 반해 바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누군가는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그것들이 까미유의 눈에는 그저 쓰레기였다.

책상 위가 거의 다 비워져 갈 때쯤 그는 뚜껑에 금이 간 유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밀봉된 유리병 안에는 값싼 사탕이 반쯤 들어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포장지가 썩은 사탕에 달라붙어있었다.

까미유는 그걸 보자마자 이게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언제였지? 14살? 아니, 그것보다 더 어렸었던 것 같다. 아마 12살. 아니면 10살. 그쯤이다.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해서 사람을 치료했을 때 조직의 어른들로부터 용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 받은 몇 안 되는 돈. 무척 기뻐하면서 그 돈으로 이걸 샀었다. 원래는 유리병의 반절 위에는 초콜릿이 반절 아래는 사탕이 들어있었다. 초콜릿은 다 먹었는지 사탕만이 조금 남아있었다.

까미유는 유리병을 그대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왜 이런 건 잊히지 않을까? 그 사탕은 까미유가 히카르도를 위해서 샀던 것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만 단 걸 먹을 수 없는 그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 샀었다. 그 아이를 내 마음대로 쓰려고 구슬릴 때마다 하나씩 꺼내 그 아이의 입에 넣어주곤 했었다. 쓰레기 같아. 기분이 쓰레기 같아.

까미유는 유리병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그걸 그대로 밀었다. 책상에서 떨어진 유리병이 바닥에 부딪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엉망이었다. 그는 발 앞으로 떨어진 유리조각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파편이 튈 때 손을 스쳤는지 손등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쯧. 그는 혀를 타고 순식간에 반딧불로 자가 치유를 했다. 그리고 선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부딪혀 깨진 사탕이 썩은 겉모습과 다르게 단 내가 피어올랐다. 창고 안을 가득 채운 그 설탕의 단내가 폐 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까미유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역겨운 게 한가득 있네.”

까미유는 이 창고 안이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 썩은 내가 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역겨웠다. 그가 어릴 적에 공부에 두각을 드러냈을 적에, 공부할 곳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조직에게서 이곳을 받았었다. 작아서 사람 하나 가둬놓고 패는 것 외에는 쓸 데가 없던 곳이라 받을 수 있었다. 아직도 서랍 뒤에는 누군가의 핏자국이 남아있을 테지만 어린 까미유도, 지금의 까미유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창고를 받은 순간, 그때 까미유는 뼈저리게 느꼈었다.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는 쾌감을. 능력이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멍청한 또래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능력도 없는 애들은 제일 하찮은 일을 하며 맞을 뿐이었다. 도태되는 멍청이들과 다른 자신의 차이를 느꼈다. 다른 아이들은 가질 수 없던 독보적인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래서 어린 까미유는 이곳에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공부를 위해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나중 갈수록 창고로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인간관계를 관리하며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편지들, 공부했던 흔적들. 의미 없는 생각들을 적어놓은 메모지, 직접 만든 비밀 언어로 작성한 일기장.

히카르도와 공유했던 그 모든 것. 그래. 이곳에는 히카르도가 있었다.

그래서 까미유는 이곳이 역겨웠다. 까미유의 유년시절은 언제나 히카르도와 함께였다. 그의 모든 유년엔 그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시절의 까미유가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지금의 까미유가 그걸 얼마나 역겨워하는지는 하등 상관없었다. 이 창고가 그 사실의 명백한 증거였다.

이것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였다. 히카르도의 흔적을 말소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랬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그동안 못했던 의료봉사를 하러 간다는 말을 전했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행동에는 자취가 남으니 어제까지는 실제로 의료봉사를 했다. 고아들을 치료했고, 노인들을 돌봤다.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주고 자신을 믿으라 속삭였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진짜 목적은 여기였다.

여기를 없애는 것. 이 장소에 남아있는 히카르도를,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러듯, 미루고 미뤘던 어느 여름방학의 숙제처럼…. 이 창고는 ‘그 사건’ 이후로 계속 까미유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까미유 데샹은 불분명한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 이 창고를 생각하면 미련이 남는지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옳고 그름, 흑과 백, 정답과 오답. 감정은 딱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건’은 분명 까미유가 원한 거였다. 후회해본 적 없었다. 까미유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완벽한 결과였다. 히카르도를 도려내게 된 것도 계획 대로였다. 그런데, 왜 계속 여기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걸까?

그래서 그는 이곳을 지우러 왔다. 히카르도 바레타를 도려내러 왔다. 이곳에 소년의 까미유 데샹이 잠들어 있었다. 어린 까미유 데샹이 히카르도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다. 그를 살해하러 왔다. 유년기의 까미유 데샹을 죽이러 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마구잡이로 쓸었다. 오랫동안 쌓인 먼지가 폭풍처럼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 먼지 하나하나에 과거가 물방울처럼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까미유는 그게 참을 수없이 싫었다.

모든 게 히카르도였다. 그가 처음 선물했던 책, 히카르도가 재미없다고 말했던 전공서적. 그가 빌렸던 소설책. 책을 읽는 도중에 히카르도가 놀러 가자고 하여 덮은 뒤로 마저 읽지 못했던 책. 그와 먹은 것들 그와 만진 것들, 그와 나눈 것들….

그 시절의 까미유는 어렸고 지금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그는 히카르도를 한 번도 이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미성숙했다. 그가 자신에게 줄 영향을 계산하지 못한 채로 커버렸다. 그 실수는 이제 어른의 까미유가 수습해야 하는 문제로 남아있다.

이제 히카르도는 필요 없다.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었다. 쓸모없는 것들은 잘라내야 했다.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으니까. 그를 위해선 그를잘라야 했다.

이 물건들은 딱히 남의 손에 넘어가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끽해야 어린아이들이 나눈 편지에 무슨 정보가 담겨있고 무엇이 그를 위협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들의 문제는 물건의 가치가 아니었다. 이것들이 까미유를 감정적으로 만든다는 거에 있었다.

까미유는 자신을 신세계의 왕이 될 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를 위해 완벽하고 신중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래, 이 모든 과정은 그것을 위해서였다. 그가 세우는 계획은 모든 방면에서 완벽하게 설계되어야만 했고, 또 완벽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까미유는 다른 때보다 감정적이었다. 필요한 것은 취하고 필요 없는 건 처분할 계획이었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난폭하지 않게 대처할 셈이었다. 그런데 꼴을 봐라.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불쾌함에 신물이 올라왔다. 이런 건 전혀 자신답지 않다고…, 까미유는 생각했다.

폭력적으로 때려 부수는 것. 주먹으로 해결하고 몸부터 나가는 족속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런 아이들을 혐오했다. 머리를 쓸 줄 모르는 멍청이라고 뒤에서 비웃곤 했었다.

까미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려입은 명품 코트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편지 봉투에는 죄다 그의 구둣발 자국이 찍혀있었다. 잡동사니의 산 맨 위에는 어떤 상자 하나가 던져져 있었다. 돌연 그 상자가 까미유의 눈에 밟혔다. 그는 구석이 찌그러진 그 상자를 꺼내들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빨간 리본으로 묶인 오래된 빛바랜 초록색 상자. 리본에는 편지가 하나 껴있었다. 겉면에는 보내는 이도 적히지 않고 받는 이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거였다. 그가 줬던 것이다.

 

「까미유. 메리 크리스마스.

네가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이해서 여기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네가 떠난 뒤로 한동안 만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편지는 꾸준히 보냈지만 답장을 보내주지 않았지? 바쁠 테니 이해하고는 있지만 조금 아쉬워.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자주 연락해 줘.

나는 아마 크리스마스 날에 바빠서 이걸 네게 제시간에 줄 수 있을지 걱정되긴 하는데,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더라도 받아주길 바란다.

넌 매번 새 책을 사달라고 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에 책을 준비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아 다른 걸 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결정한 거야.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까미유.

항상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날 치유해 줬던 보답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마음에 들길 바라.」

 

삐뚤삐뚤한 글씨. 그는 항상 악필이었다. 여기에 적힌 저번의 보답은 그때 히카르도의 팔이 부러졌던 일을 말하는 거였다. 그는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다. 벌레에게 좀 먹히고,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리본을 풀어 상자 안을 보았다. 상자 안에는 회중시계가 하나 들어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의 수수한 회중시계. 이걸 왜 샀냐고 그를 타박했던 기억이 났다. 시계의 초침은 12시를 가리키며 멈춰있었다. 그가 줬던 시계는 고장 난 채였다.

까미유는 더는 움직이지 않는 시곗바늘이 히카르도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히카르도는, 여전히 그 시절에 멈춘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까미유와 히카르도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은데도, 두 사람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어도, 그는 아직도 옛날의 친구를 버리지 못한 채였다.

자신들을 둘러싼 세간의 수군거림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지금까지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히카르도가 모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돌아가는 지도 알았다. 입으로는 그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나한테 이로우니까.

이렇게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버리기로 결정했는데, 어째서 히카르도는 그 반대를 원하고 있는 걸까. 왜 아직도 미련투성이의 추억을 버리지 못한 채인 걸까. 까미유는 그의 생각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그의 행동원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장난 회중시계를 쥐었다. 살짝 흔들자 안에서 태엽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줬을까. 까미유가 히카르도의 생각을 이해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작은 머리통 속에 담겨있는 생각은 몰랐다. 끽해야 ‘친구를 지켜줘야 해’ 같은 희대의 정의의 사자 같은 생각만 알고 있을까.

동상이몽이라고. 둘은 절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사상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목적도 달랐다. 그래서 당연하게 내가 버린 건데. 갈라진 건데. 어째서 히카르도는?

그날의 크리스마스를 똑똑히 기억한다. 6년 전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대학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그때 까미유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히카르도는 조직의 중요한 일을 서서히 혼자 맡아 해결하던 시기였다.

 

***

 

히카르도와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9월에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로 처음 보는 거였다. 히카르도는 자주 까미유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었지만 까미유는 정신없는 학창생활 때문에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까미유의 안에서 히카르도는 언제나 우선순위가 최하위였다. 그도 그럴게 관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히카르도와 까미유의 관계는 친구라기엔 조금 기묘했다.

까미유는 대학 입학한 뒤로 한 학기 동안 바쁘게 생활했다. 시간은 금이었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졸업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수업을 두세 개 더 들었다. 그건 까미유가 다른 사람들보다 여섯 배는 더 바빠진다는 걸 의미했다.

히카르도는 그런 사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답장이 오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항상 내용은 별거 없는 이야기였으나 어쨌든 그는 빠짐없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편지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만난 히카르도는 키가 훌쩍 커있었다.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온 그는 검은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니면 썩은 손이 시렸는지 양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 숨긴 채였다. 그는 장갑도 낄 수 없었다. 벌레에 잠식된 손은 그의 살갗뿐만 아니라 가죽조차도 갉아먹기 일쑤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히카르도의 첫인사는 이거였다. 반가워, 오랜만이야, 그런 인사말 하나 없이 그는 어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인사했다. 담백한 그의 인사와 빨갛게 물든 코를 힐끔 보고 까미유가 입을 열었다.

“키가 더 컸네.”

히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난 성장기 거든. 너보다 어리니까 말이야.”

히카르도는 ‘어리다’에 힘을 주어 말했다.

“188? 마지막으로 쟀을 때 그랬는데.”

“곧 나보다 크겠네.”

“싫어?”

“상관없어.”

까미유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슷해진 눈높이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의 키가 좀 컸다고 해서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방학 동안 여기 있을 거야?”

히카르도는 괜히 까미유의 눈치를 봤다. 그는 까미유의 기분이 괜찮은 것 같자 그의 기분이 바뀔세라 까미유의 짐을 뺏어 들었다. 옷가지가 몇 개 들었을 뿐이라서 무겁지도 않았는데. 또 그걸 굳이 사양하기도 귀찮아서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내버려 뒀다.

“아니. 크리스마스만 보내고 바로 돌아갈 거야.”

“방학 2주나 되지 않았어?”

히카르도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난 바쁘거든.“

까미유의 단호한 말에 히카르도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에서 나오자 히카르도가 미리 준비해둔 마차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는 신문을 보며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히카르도를 보자 이제야 왔냐는 듯 환하게 얼굴이 밝아졌다. 까미유는 허! 헛웃음을 지으며 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마차를 불렀어?”

“그럼 걸어가자고 할 줄 알았어?”

나도 조직에서 이제 꽤 돈을 받거든. 공부만 하느라 돈 한 푼 없는 누구랑은 다르게. 히카르도는 마부의 옆자리에 짐을 싣고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까미유를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까미유는 그런 그를 한번 째려본 다음 히카르도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질투할 필요 없어. 조직에서 제일 신경 써주는 건 너일걸. 네 학비가 얼만데.”

“시끄러워. 리키. 말이 많아졌네.”

“하하하.”

히카르도가 웃으며 마차 문을 닫자 곧이어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흔들렸고, 둘 사이엔 정적이 찾아왔다.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고요함이었다. 히카르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는 마차가 덜컹거리는 박차에 맞춰서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까닥였다.

까미유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보다 그는 더 자랐다. 더 남자다워졌고,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머니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을 보았다.

회색빛으로 변한 그의 피부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울 터였다. 시체에 온기가 존재하지 않듯, 그에게도 온기는 없을 거였다. 공기 중의 냉기를 다 흡수해서 얼음보다 차가운 송곳 같은 손.

그 순간 벌레 한 마리가 그 창백한 피부를 찢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위이잉. 귀에 거슬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날아올랐다. 마차 속의 세상. 그 좁은 곳을 헤엄치는 벌레 하나가 까미유의 신경을 긁었다. 히카르도는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까미유는 그 모습이 짜증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지긋지긋한 고향은 반 년사이에도 변한 것 없이 여전했다. 버려진 고아였던 까미유와 히카르도가 이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도 이곳은 박제된 것처럼 그대로였다. 마을 사람들은 똑같이 철이 없었고, 순진했으며 단순했다. 까미유가 무슨 말을 하든 매번 쉽게 속아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에는 유난히 각박하지. 고아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 그냥 주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까미유가 사색에 잠겨있는 사이에 어느덧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말을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뒤, 의외의 장소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카모라 조직의 본거지가 아니라 히카르도의 개인 아파트였다.

“왜 이리로 온 거야?”

까미유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가 살던 방은 너 대학 간 뒤에 다른 신입에게 줘버렸거든.”

“뭐라고?”

“내가 준 거 아니야.”

히카르도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열쇠를 꽂아 문을 열었다.

“네 짐은 내가 가지고 있어.”

문이 열려도 까미유가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히카르도는 그의 손을 끌고 억지로 안으로 들어갔다.

“리키!”

까미유가 몸을 뒤로 빼며 그를 불렀다.

“어차피 보스랑은 내일 만나기로 했잖아? 갈 곳도 없을 텐데 여기서 자.”

“호텔로 갈 거야.”

“사양하지 마.”

까미유를 안에 밀어 넣고 히카르도는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내가 왜…. 아파지는 머리를 붙잡고 히카르도에게 무어라 한 소리 하려다가 참았다. 까미유는 소파에 마음대로 자리 잡고 앉으며 그의 집을 살펴봤다. 언제 이사한 거지?

히카르도의 방은 좁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 그 안쪽에는 침실이 띠로 있었다. 설마 소파에서 자야 돼? 까미유가 불만스럽게 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옷걸이에 목도리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코트도 벗고 정장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내 침대를 쓰도록 해.”

히카르도가 까미유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너는?”

“나는 다시 나갈 거야.”

“어디 가는데?”

히카르도는 서랍에서 총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

“임무가 있거든. 새벽에나 들어올 테니까 먼저 자.”

그렇게 말하면서 까미유에게 방 열쇠를 건넸다.

“놀러 나가는 건 상관없지만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면 열어주지 마.”

“장난해?”

“조직 녀석들을 불러서 놀아도 돼….”

그는 그제야 뒤를 돌아 까미유를 보고 혀를 찼다.

“넌 그 녀석들을 안 좋아하지. 그러다가 정말로 나 밖에 친구 없다?”

“웃기지도 않네.”

리키. 까미유가 신경질적으로 히카르도를 불렀다.

“다녀올게.”

그는 대답 대신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까미유는 방에 혼자 남겨졌다. 히카르도가 문을 잠그긴 했지만 안에서 못 여는 구조는 아니라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열쇠를 주고 가기도 했고.

누가 찾아와도 열어주지 말라니? 누굴 어린애 취급하는 건가. 거기다가 본인은 어떻게 들어오려고.

하아.

까미유는 갑자기 그를 신경 쓰는 게 귀찮아져서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알아서 임무에 나갔고, 알아서 잘 들어오겠지. 그의 말대로 알아서 집을 잘 이용하면 되는 거였다. 기왕이면 좋은 호텔에 묵으려고 했는데.

그는 히카르도의 부엌에서 멋대로 커피를 찾았다.

“싸구려잖아.”

포장지에 적힌 커피 브랜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새 커피 원두. 분명 까미유를 위해서 사다 놓은 게 분명했다.

그는 커피를 들고 부엌 식탁에 앉았다. 이렇게 시간이 남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짐을 뒤적거렸다. 히카르도가 나간 건 예상 외였으나 그가 귀찮게 달라붙지 않게 된 건 운이 좋았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까미유는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요즘 새로 시작한 연구의 논문이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펜을 저었다. 글이 잘 써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싸구려 커피의 맛은 엉망이었지만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건데, 이렇게 시간이 날 줄은 몰랐다. 히카르도도 가끔은 도움이 된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히카르도의 능력을 한번 실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능력이 연구에 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여도 내년 여름방학 때까진 뭔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좀비와 같은 상태는 쓸모가 있었다.

약의 임상실험을 우선 히카르도에게 한다면…. 까미유가 메모지를 꺼내 무언가를 바삐 적었다. 괜찮을 것 같다. 그에게는 뭐든지 실험해도 되니까. 히카르도는 죽지 않아서 편했다. 그는 모든 연구자들이 원하는 완벽한 실험체였다. 이상향의 실험체. 결과는 나오면서 실패는 되지 않는다. 이데아의 좀비 그 자체.

히카르도의 방에서 그가 준비해둔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싸구려 커피를 다시 마시고, 연구 일지 작성도 마쳤는데도 히카르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밖은 가로등조차 꺼져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 없이 동물들도 지쳐 잠들어 있었다. 스산한 분위기의 마을의 밤은 별 하나 떠있지 않았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해가 뜰 때쯤에나 돌아올 듯했다.

까미유는 사양하지 않고 히카르도가 낮에 권한대로 그의 침대에 누웠다. 그를 기다릴 생각은 애초에 처음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

침대 시트를 일부러 갈은 건지 좋은 냄새가 났다. 히카르도에게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그의 체향은 살짝 서늘한 향기와 함께 살이 썩어가는 냄새가 섞여있었다. 그 불쾌한 냄새 없이 시트엔 기분 좋은 향기만 가득했다. 덕분에 잠드는 건 금방이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어스름하게 들어오는 시간. 부지런한 이들은 벌써 일어났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은 잠에 빠져있는, 아침과 새벽의 그 경계에서 까미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그를 깨웠다.

까미유는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반딧불을 보냈다. 반딧불이의 불빛이 흐릿한 거실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그 빛에 비친 건 쓰러져 있는 한 남자였다.

”리키?“

까미유가 이름을 부르자 히카르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는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좌우로 흔든 손이 금세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아니 어지간한 능력자도 죽었을 상태였다. 히카르도가 아니었다면 죽었다. 히카르도의 능력의 특수함 덕분에 그는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스스로 쥐어뜯은 가슴, 피에 물든 몸, 썩은 피부는 이리저리 뭉개졌고 그의 몸 주위로 수십 마리의 벌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벌레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의 멀쩡한 피부를 찢고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까미유는 말없이 반딧불을 사용해 그를 치료했다. 손끝에서 나간 반딧불이 그가 시키는 대로 엉망인 몸을 파고들어 치유했다. 까미유의 반딧불이 가까이 올 때마다 히카르도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벌레들이 반딧불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사용하는 반딧불보다 잡아먹히는 반딧불이 더 많은듯했다. 그 벌레들은 반딧불을 죽여 히카르도의 치유를 방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딧불을 잡아먹고 벌레가 재생하면서 자연스럽게 히카르도의 몸도 치유가 되고 있었다.

까미유의 반딧불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공생관계였다. 까미유는 단순히 반딧불을 다룰 뿐이지만, 히카르도와 벌레들은 서로를 갉아먹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득보단 실이 큰 공생. 그 꼴이 웃기다고 까미유는 생각했다. 평소엔 히카르도의 몸을 파먹으며 살아가는 벌레 주제에.

대충 치료가 끝났을 땐 히카르도는 지쳤는지 쓰러지듯 잠들어있었다. 살을 파먹는 고통 자체가 주는 정신적 피로도 상당했을 거였다. 갑자기 송장으로 돌아온 히카르도가 어이가 없어서 까미유는 그가 환자라는 걸 개의치 않고 그의 머리를 한 대 후려쳤다. 환자? 죽지도 않는데. 까미유는 또 다시 그를 때렸다.

히카르도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떨어졌다. 벼락같은 아픔에 눈을 뜬 그를 보고 까미유는 말없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까미유!”

잠긴 히카르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았다.

“뭐야.”

까미유는 침실 문을 닫으려다 말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거 받아.”

가슴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잡은 다음 보니 웬 초록색 상자였다.

“이게 뭔데?”

“크리스마스잖아. 선물이야. 치료해 준 감사의 마음으로.”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엔 작은 편지가 하나, 그리고 안에는 회중시계가 들어있었다. 그 시계는 째깍째깍 특유의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런 시계 하나로 내 치료비가 충당될 거라고 생각해?”

“안돼?”

“흥, 어림도 없지.”

까미유가 코웃음을 쳤다.

“난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 없어서 모르지만. 대학에서는 시간이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들었어. 너 제대로 된 시계는 있어?”

“있어. 그리고 어차피 이건 안 쓸 거야.”

회중시계를 다시 상자 안에 넣어 포장했다.

“왜?”

히카르도가 물었다.

“그냥.”

싫으니까. 그 말에 까미유를 잘 아는 히카르도는 다시 되묻지 않았다. 네가 싫으면 싫은 거겠지.

“버리지는 마.”

“내 마음이지.”

한 손에는 히카르도가 준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론 가방을 뒤졌다. 손끝에 찾던 게 걸리자 까미유는 그걸 아까 히카르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던졌다.

“다리 쭉 뻗고 자고 난 다음에 확인해.”

까미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실 쪽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고맙다는 히카르도의 외침이 들렸다.

시끄러워. 아직 새벽이라고. 까미유는 불만스럽게 눈을 감았다.

 

***


그때 난 그에게 무슨 선물을 줬더라?

그 물음과 함께 까미유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뭘 줬더라? 이상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로 기억을 누군가가 도려낸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하니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까먹는 일이란 게 있을 수가 없는데. 까미유는 눈을 깜빡거렸다.

눈앞에는 빛바래 낡은 상자가 하나 있다. 그 안에 든 회중시계는 고장 난지 오래라 초침이 멈춰있었다. 12시를 가리키고 멈춘 시계. 이 시계는 오전 12시에 죽었을까, 오후 12시에 죽었을까.

까미유는 회중시계에 반딧불을 부딪쳤다. 유리벽에 부딪힌 반딧불이 파르르 떨고 비실비실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시계는 당연하게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 고쳐질 리가 없었다. 나와 히카르도의 관계는…, 이 시계와 마찬가지다. 까미유는 상자를 던졌다. 벽에 부딪혔다가 그 바닥에 떨어지면서 상자 속에서 회중시계가 튀어나와 깨졌다.

까미유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히카르도 바레타에 대한 이용 가치는 끝났다. 가치 없는 건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리해야만 했다. 그에 관한 모든 건 치워버려야 맞았다. 그의 기록은 전부 의미 없는 것이었으며, 쓸데없는 감정팔이의 연장선이었다.

까미유는 주머니에서 가져온 라이터를 꺼냈다. 탁-. 뚜껑을 열자 가스불이 피어올랐다. 라이터의 불꽃은 푸른색인데 어째서 물건을 태울 땐 붉어지는 걸까. 그의 푸른 피부에서 피어나는 붉은 피처럼…. 까미유는 그대로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등 뒤로 라이터를 던졌다.

타닥, 타다닥,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불빛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날처럼 하늘엔 별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그때와 달리 고장 나기 직전인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고 군데군데 켜져 있었다. 까미유는 불길이 닿지 않는 곳, 담장에 기대고 서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까미유 데샹이란 남자의 행동방식은 미련을 갖지 않는 거였다. 이용할 건 이용하고, 취할 건 취한다. 감정이란 쓸데없는 뇌의 작용 중 하나였다, 그는 그걸 절제할 줄 알았다. 동정심, 안타까움, 미련…. 그 모든 건 그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까미유를 막아서는 건 오로지 히카르도뿐이었으나 이젠 그도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왜냐면 까미유는 살인에 성공했으니까. 드디어 그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까미유 데샹을 죽였다.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이 불이 꺼지고 나면 재만 남게 되겠지.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이제 히카르도를 제 곁에 두려고 급급했던 미숙하고 어린 까미유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까미유 데샹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살해했다.

 

***


까미유는 고향을 떠나기 앞서 어제의 레스토랑에서 또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오너에게 오늘 떠난다고 말하자 그가 꽤 아쉬운 눈치를 주었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펴자 신문 헤드라인에 어제 발생한 화제가 크게 적혀있었다. ‘방화로 인한 피해자는 없으며, 경찰 당국은 사고인지 확인하는 작업에….’ 신문의 그 문구를 읽으며 까미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급스러운 원두 향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다가 목 너머로 넘어갔다.

그는 더 이상 싸구려 커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 까미유는 신문을 덮었다.

기차 시간이 다 됐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그녀들이 또 한마디 할지도 모른다. 돌아가서 약속했던 대로 미아와 미셸과 셋이서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야지. 까미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에 선물을 사 가는 게 좋을까? 그 또래의 아이들이니 어른스러운 물건을 좋아할 것 같았다. 미쉘에겐 향수를 사줄까. 미아에겐… 그 애에겐 새 장난감이 좋겠어. 미아는 생각을 분산시킬만한 게 필요해. 그녀를 위해서도, 그녀가 망가져있길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직은 미아가 진실을 아는 걸 원하지 않았다.

케이크는…, 가는 길에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겠지. 식탁 위에 팁을 놓고 거리로 나왔다.

성공한 의사로 성장한 어른, 까미유 데샹은 유유히 자신의 범죄현장을 떠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어젯밤 자살(自殺)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