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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추금릉] 부전자전

NickX 2020. 1. 10. 02:33


원래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다, 고 눈앞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노려보며 금릉이 생각했다. 자신이 과하게 행동했다는 자각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커질 일은 결단코 아니었다. 악운이 쓰여도 이정도로 씔 수는 없었다. 금릉은 쪼그리고 앉아 이 일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분명 선자만 데리고 홀로 떠난 야렵이었다. 외숙이 잔소리를 하면서 자기 수하의 사람을 몇 명 붙여주려 했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거절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래야만 했었다!

금릉이 도착한 곳은 난릉 남쪽의 낙천 지방으로, 커다란 폭포가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은 낙천산에서 가파른 절벅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그 유명한 낙천폭포로 이번 야렵의 장소였다.

요 근래 그 낙천의 근원이 되는 낙천가에 가면 -금릉은 왜 죄다 이름이 이 모양이냐며 비웃었다.- 강 위에 떠다니는 신묘한 여성의 혼백과 만난다는 소문이 낙천 지방에 돌았다. 사람을 물속으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또 만난 이의 혼백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물 위에 서있는 흐릿한 영혼과 대면할 뿐이라고 했다. 순진하고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는다는 게 유일한 피해사항이었다. 

해를 끼치지 않으니 손댈 것도 없겠지 싶어서 혼자 해결하려 했던 건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낙천 지방 근처에 도착했을 때 금릉은 고소 남씨의 어린 문하생들과 마주쳤다. 그들도 같은 소문을 듣고 낙천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남사추와 남경의를 중심으로 그들보다 더 어려 보이는 서너 명의 어린 남씨 수사가 함께였다. 이렇게 됐으니 같이 가자며 남사추가 금릉에게 제안했고, 금릉은 거절할 구실을 찾지 못해 마지못해 수락했었다. 아무래도 그게 이 사단의 발단인 것 같았다.

그들과 같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평정심을 잃을 일도 없었을 거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거다!

정체불명의 혼백이 나오는 곳은 특정되어 있지 않고 매번 달라진다고 산 아래에 있는 마을 사람이 말했다. 그래서 일행은 낙천산 봉우리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낙천강 물줄기를 따라서 강을 훑으며 내려오기로 했다. 그리고 금릉은 그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위무선과 관련되어 고소 남씨 아이들과 몇 건의 사건을 함께한 금릉은 그 뒤로도 부쩍 친해진 그들과 같이 야렵에 다녔었는데, 금릉은 그때부터 자신이 이상해졌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씨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야렵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외숙에게는 혼자서도 충분해서 그렇다고 변명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그 남씨 가문의 어린 수사 중 하나인 남사추 때문이었다.

남사추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이 나는 것처럼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마치 독에 당한 느낌이었다. 야렵 도중에 싸움이 벌어지면 그 망할 몸 상태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었다. 자존심이 높은 금릉은 그런 자신을 참을 수 없었고, 남사추 곁에만 있으면 그랬기에 남사추와 거리를 두려 했었다.

그러나 남씨 일행의 중심은 남사추였고, 그만 빠진 야렵도 없었던 데다가 애초에 금릉은 남사추와 남경의를 제외하곤 이야기를 나눠본 남씨 문하생도 없었다. 남사추를 피하면서 누군가랑 같이 야렵을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리하여 금릉은 오로지 남사추를 피해기 위해서 혼자 야렵을 떠났던 거였다.

아무튼 금릉은 남사추가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 어쨌든 이것저것 모두! 망가뜨리게 두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서 근 몇 개월간 혼자 돌아다녔는데, 그리고 예전의 멀쩡하던 자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높은 산을 남사추와 함께 오르고, 심지어 함께 내려가고, 신묘한 혼백도 같이 찾고, 같이 처지 해야 하다니! 금릉은 끔찍했다.

금릉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아릿거리는 마음에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금세 눈치챈 남사추가 돌아보면서 '무슨 일 있나요?'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긴 있지! 금릉은 그리 말할 수 없어 괜히 소리 높여 괜찮다고 대답했고 그런 그를 남경의는 왜 저래? 하는 눈빛으로, 남사추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봉우리에 도착해서 풍사반을 꺼냈을 때, 그들은 다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사반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장 난 거 아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어. 이건 위선배께서 새로 만들어 주신거야."

남사추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의 머릿속에 혹시 예전 천녀상 때처럼 큰일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도 풍사반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잖아? 금릉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하며 말했다.

"하,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금릉이 허세를 부리며 말하자 다른 고소 남씨 아이들도 괜찮을 거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남사추를 달랬다. 다수결로 예정대로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하자, 남사추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락용 신호탄이 잘 있는지 확인하라 조언했다. 그 말에 모두들 자기 가슴께에 들어있는 신호탄을 확인했고 신호탄이 잘 있자 다들 안심했다. 소문대로 간단한 일이면 매우 좋고, 아니어도 신호탄을 쏘면 선배님들이 도우러 와주실 거였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일행은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금릉은 자신이 정말로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몇 달간 남사추를 만나지 않으면서 자기의 이상행동도 사라졌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왜인지 전보다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남사추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보느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금릉! 왜 이러는 거야! 스스로의 뺨을 짝짝 때려 정신을 차리려 했다. 절로 돌아가는 시선을 억지로 강가에 고정했다가도 눈이 다시 남사추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조금만 넋을 놔도 남사추의 뒤통수에서 흔들리고 있는 말액에 시선을 빼앗겼다. 남사추가 진지하게 강을 훑어보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그가 검을 쥐고 있는 손을 엿보고, 심지어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말액을 잡아당겨버릴 뻔했다!

이게 다 눈에 거슬려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이 저걸 신경 쓸 리가 있겠어? 고소 남씨는 말액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면서 대체 왜 저렇게 쓸데없이 길게 만들어 놓은 거람? 찰랑찰랑 흔들리는 게 너무 신경 쓰이잖아!

"너무 어지러워..."

금릉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남경의가 불쑥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 아파? 아까부터 얼굴이 빨개."

"금공자가 편찮으시다고요?"

그 말에 남사추도 뒤를 돌아 다가왔다.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금릉을 바라본 남사추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금공자, 열이 나는 것 같아요."

남사추가 금릉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저 금릉이 이마에 손을 대 열을 재보려고 했을 뿐이었지만 심장이 쿵쿵 뛰느라 제정신이 아닌 금릉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손을 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금릉! 너야말로 뭐야! 사추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짝-. 손등 치는 소리가 크게 나자, 남경의가 질세라 남사추를 변호하며 나섰다. 남사추는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뒤로 숨기며 몇 걸음 떨어지더니 금릉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공자께서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남사추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 말에 금릉은 자신의 이마에 급하게 손을 올려봤지만 온몸이 화끈거려서 인지 열이 나는지 아닌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흥, 하고 토라진 금릉이 그대로 남사추와 남경의를 앞지르며 달려나갔다.

"말하는 것 좀 봐! 안 본 사이에 아씨가 철 좀 들었나 했더니 왜 더 괴팍해진 거람?!"

"경의야."

남경의가 금릉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리자 남사추가 주의를 줬다. 남경의는 불만스러워 입을 삐죽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금릉을 따라 뛰었다.

"금릉! 같이 가야지! 치사하게 먼저 가기냐!"

금릉은 한참을 전력 질주 한 다음에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맑은 물로 연거푸 세수를 했다. 정신 좀 차려! 과도하게 놀라는 것도 그만하고, 과하게 신경 쓰는 것도 그만해 금릉! 대체 왜 남사추만 엮이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지?

"헉.. 허억.. 금릉.. 천, 천천히 가자고!"

뒤늦게 쫓아온 남경의가 불평을 토해냈다. 그리고 금릉의 근처에 널브러지며 못 뛰겠어! 라고 칭얼거리며 외쳤다.

"물 좀 마셔."

같이 뛰었지만 둘과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남사추가 남경의에게 물통을 건넸다. 그리고 여전히 쪼그려 앉아있는 금릉의 곁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였다. 혹여나 금릉이 다시 자기의 손을 쳐낼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다가온 손이었다. 천천히 숨을 쉬도록 토닥여 주는 손길에 금릉은 또 딱딱하게 굳었다가 다시 한번 세게 세수를 하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신경 안 쓸 거야!

"이제 괜찮,"

고맙다고 말을 하려던 금릉은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것에 흠칫 놀라 말을 멈췄다.

"혼.. 혼백이다!"

남경의가 크게 소리 질렀다. 남사추도 그에게 소란 피우지 말라고 주의 줄 새 없이 급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왈왈! 저 어디선가 선자도 짖기 시작했다.

소문과는 다르잖아!? 금릉이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소문에선 신묘한 여자 혼백이라고 했었지 이렇게 이것저것 뒤섞인 괴이한 혼백이라고 하진 않았었다! 혼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모양새였다. 머리는 고양이로 되어있었고 하얀 소복을 입고 있지만 드러난 손은 말발굽이었으며 치마는 찢어져 다리를 다 보여주고 있었는데 왼쪽 다리는 사람의 것이었고 오른쪽 다리는 나무토막이었다. 와중에 고양이 얼굴에서 길게 내민 혀는 뱀의 것으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분명 신체의 형태는 여성의 모습이었고 검은 머리카락도 길게 늘어져 부드럽게 찰랑이고 있긴 했으나 과연 이 모습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은 걸까?

금릉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나는 걸 느끼며 세화를 쥐었다. 몸을 벌떡 일으킨 금릉이 검을 뽑아 그 혼백을 베려는 그 순간 그것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지 못하구나."

혼백이 말한 건가? 그 자리에 있던 어린 수사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그건 결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윙윙 울리는 게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사악 거리는 게 뱀 울음소리 같기도 했으며 혹은 들어본 적 없는 머나먼 이국의 언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더 놀라운 건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뭐라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도와줄까? 도와줄까?"

혼백이 금릉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좋겠어! 그게 좋겠어!"

금릉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혼백이 깔깔 웃으며 혼자 말을 이었다. 그걸 웃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 고양이 얼굴은 - 얼굴만 놓고 보면 매우 귀여웠다.- 원래도 웃는 얼굴처럼 보여 잘 구분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금공자, 조심하세요!"

괴이한 모습이긴 했지만 우선 귀여운 얼굴이었고, 사람을 헤치지 않는다고 마을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서 말했었기 때문일까? 금릉은 그만 방심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혼백이 그 말발굽으로 된 손으로 금릉을 잡아끌어 물에 빠트렸다.

"금공자!"

곁에 있던 사추가 그를 붙잡았지만 결국 금릉을 따라 같이 강에 빠졌다.

"사추! 금릉!"

남경의가 아연실색하며 그들을 불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괜찮아! 물이 얕아. 일어날 수 있어."

남사추가 그를 안심시키며 대답했다. 실제로 강은 자갈 바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얕았다. 또 물살이 세지 않아서 설령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깊이였더라도 문제없이 수영할 수 있었다.

"안돼! 그럼 안돼!"

혼백이 불쾌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 번쩍번쩍 몇 번 뛰어올랐다. 혼백이 제자리에서 뛰자 갑자기 강이 반응하듯 물이 깊어지고 물살도 거세졌다.

"젠장! 뭐냐고!"

금릉이 허우적거리며 물 위로 나오려 노력했지만 연거푸 물만 먹고 다시 꼬르르 물속으로 빠질 뿐이었다. 남사추는 그를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물 위로 끌어당기려 했지만 남사추 자신도 커다란 물살에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둘은 그대로 흘러가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폭포 아래로 떨어진 뒤였다. 아니 정확히는 떨어지는 폭포 안쪽에 숨겨진 동굴에 있었다. 푹 젖은 것만 빼고는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사지가 멀쩡했다. 쥐고 있던 검은 어디선가 놓쳐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신호탄은 물에 흠뻑 젖어 당연하게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서둘러 주변을 살피자 옆에 정신을 잃은 남사추가 쓰러져 있었다. 뾰족한 바위 위에 기이하게 누워있는 그 모습에 금릉은 그를 동굴 안쪽으로 끌고 와 평평한 곳에 눕혔다. 또 아무리 봐도 누군가가 준비한 게 분명한 마른 장작이 잔뜩 쌓여있어 그걸로 불을 피웠다. 사람이 올 수 없는 곳에 멀쩡한 장작이 있다니. 제정신이냐! 그 혼백이 꾸민 짓이 틀림없었다. 만약 주모자가 사람이면 그건 그것대로 무서웠다. 친절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대로 흘러서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런 곳에 무사히 안착하다니 요행이었다. 요행일 리가 없었다! 다 그 혼백이 만든 상황이라고!

금릉은 씩씩 거리며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장막처럼 입구를 가리고 있어 절경이었다. 동시에 저걸 헤치고 나가자는 생각을 절로 접게 만들어 주는 풍경이었다. 검이라도 있으면 어검해서 나갈 텐데 검이 사라져 그럴 수도 없었다. 물 안에 갇힌 건지 불러도 반응이 없는 게 당분간 검은 잊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무슨 검인데."

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금릉은 갑자기 울적해져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아버지의 유품인 세화를 다시 찾을 수 없을 가봐 두려웠다. 나한텐 남은 건 그거뿐인데.

입구로 나갈 수 없다면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까? 동굴 안쪽을 바라보자 깊게 길이 나 있었다. 어두컴컴한 게 빛이 보이지 않았고 안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처럼 보였다. 들어가도 무모한 짓 같이 느껴졌다. 그럼 기약 없이 구조를 기다려야 할까? 그래. 어쩌면 이쪽이 더 확률이 높을 수도 있다. 혼백이 남경의 일행을 어떻게 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남경의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니 아마 무사히 도망쳤을거다. 그럼 신호탄을 쐈을 거고 함광군이든 다른 선배들이든 와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을 거였다! 아니면 똑똑한 우리 선자가 외숙을 불렀을 수도 있고! 

금릉은 동굴 안쪽을 탐색한다는 선택지를 잠시 접어두고 시선을 남사추에게로 옮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모닥불 옆에 눕혀두긴 했는데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거기다 남사추는 자길 구해주려다 괜히 봉변을 당한 건데. 금릉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주었다. 그리고 손을 올렸다. 아까 남사추가 금릉에게 해주려고 했던 행동이었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지만 역으로 몸이 살짝 차가운 게 걱정되었다. 고소 남씨는 다들 체온이 높아서 냉천에 들어가도 끄떡없다고 하던데... 그런 고소 남씨가 체온이 낮으면 안 좋다는 뜻 아닌가? 모닥불을 힐끗 봤지만 이미 충분히 따뜻하게 피어오르고 있어 손댈 곳이 없어 보였다. 어쩌지 어쩌지 하며 금릉의 손이 허공을 맴돌다가 결국 남사 축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허어억 하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니! 난, 난.. 그저.. 젖은 옷은..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야!"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단 벗는 게 나을 것이고, 또 다 마르면 얼른 다시 입혀주면 남사추에게도 좋겠지. 금릉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 옷도 젖어 축축했지만 자기 건 체온으로 천천히 말리면 되겠거니 했다.

"어쩐지 더운 거 같기도 하고."

금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사추의 옷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느정도 옷이 마르자 남사추에게 다시 입혀주러 고개를 돌린 금릉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언제 눈을 떴는지 남사추가 민망하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앉아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금..금공자가 옷을 벗길 때부터요."

"왜 말 안 한 거야?!"

"...민망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소곤소곤 말하는 남사추때문에 금릉도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거 같잖아! 대체 왜 티도 안 내고 가만히 있었던 거람?!

"민망할 게 뭐 있어? 젖은 상태로 있다간 큰일 날 거 같으니 그랬지! 대충 말랐으니가 알아서 입어."

금릉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가 말린 옷을 던져주자 남사추가 작게 대답하고 뒤돌아 주섬주섬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순간 멍하니 바라보던 금릉도 곧장 정신을 차리고 모닥불을 보며 앉아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그게 뭐 일 거 같아?"

남사추가 옆으로 와 앉자 금릉이 물었다.

"혼백이요?"

"그래. 분명 마을 사람들은 절대 사람을 헤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녔잖아!"

"흉령이라기엔 사악함이 보이지 않았고 귀라고 하기엔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또 요괴와 괴물이라고 하기엔 사람의 형태가 섞여있어 확실치 않습니다. 여러 요괴와 괴물에게 사로잡힌 마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가능한 건지.."

남사추의 추측에 금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뭐라고 딱 정의하기에 너무 이상하게 생겼었어. 말하는 것도 들었지? 말소리는 뭔지 모르겠는데 내용이 이해가 된다고! 사람들이 말하길 신묘한 여성이라 했는데, 몸에 굴곡이 있는 것 말고는 여체인 걸 알아보기도 힘들었다고. 소문과는 별개인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낙천은 사람의 왕래가 잦아 그만큼 소문이 빨리 도는데 아까와 같은 것이 있었다면 분명 그에 대한 소문도 돌았을 거라고 봐요."

"그럼... 갑자기 변모했다는 이야길까?"

남사추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니면 본래 모습을 감춰왔을 수도 있고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금릉이 묻자 남사추는 면목없다는 듯이 모르겠다며 말을 흐렸다. 왜 네가 미안해하는데? 금릉이 어이없어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재채기가 터져 나와 그러지 못했다.

"에취!"

"금공자?"

"괜... 괜찮.. 에취!!!!"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남사추가 성큼 다가와 몸을 딱 붙여 금릉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뭐..뭐하는 거야. 당황해서 차마 말로 내뱉지도 못하고 금릉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며 남사추의 하는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열이 나요. 금공자. 아까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물 벼락을 맞기까지 했으니... 제 옷을 덮으세요.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아니, 괜, 괜찮은데?"

"아니요. 금공자도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돼요. 옷을 벗지 않아서 제대로 마르지 않았잖아요. 안되겠어요. 제 옷을 걸치시고 중의라도 벗어서 말리는 게 좋아요."

남사추가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말하며 금릉의 겉옷을 벗겼다. 허리띠를 푸르고 난릉 금씨의 상징인 금성설랑이 그려진 옷이 흘러내리자 금릉이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차, 차라리 내가 할게!"

금릉의 그 말에 남사추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옷을 벗기던 손을 놓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 깨달은 남사추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가 얼굴이 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새하애지기까지 하더니 뒤돌아 자신의 옷을 건네고 미안하다 사과했다.

괜찮다고 금릉이 대답했지만 민망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중의를 벗고, 내의 위에 남사추의 겉옷을 걸친 금릉은 한숨을 쉬었다. 몸에 걸친 옷에서 남사추의 향기가 났다. 무슨 향이지? 전에 야렵하다가 운심부지처에 들렸을 때 났단 그 향이었다. 금릉은 소매에 코를 킁킁대며 향을 맡다가 남사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를 똑바로 펴 앉았다.

"좋.. 좋은 향기가 나서 그랬어."

"향기요?"

남사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운심부지처에서 나는 향인거 같은데. 무슨 향이야?"

"글..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 물에 젖어서 나는 냄새가 아닐까요?"

"지금 내가 물 냄새랑 네 체향도 구분 못한다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저는.. 제가 맡기엔.."

"너에겐 뭔데?"

남사추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금릉이 답답해하며 되물었다.

"저에게는, 금..금공자 향 밖에 안 나는데요."

"뭐어?"

"..연꽃향이랑 백모란의 향이 나요."

"당연하지. 연화오에는 연꽃이 많고 금린대는 백모란으로 장식하니까.

너에게서도 운심부지처와 비슷한 향이 난다니까. 금릉이 덮고 있는 사추의 겉옷의 향기를 다시 맡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사추에게 다가갔다. 거봐. 향기가 똑같잖아. 이렇게 말하며 사추의 목 근처에서 킁킁 숨을 들이켰다.

"금..금공자..."

"응?"

"간지러워요..."

남사추가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차마 너무 가깝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워 한 바퀴 돌려 말했다. 실제로 간지럽기도 했다. 열이 나서 뜨거운 금릉의 숨결이 예민한 목에 닿았다가 떨어지니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아."

금릉이 멍청한 소리를 내더니 남사추에게서 얼른 떨어졌다. 그리고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잔뜩 지르곤 자기의 머리를 퍽퍽 치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남사추가 보기에 금릉은 지금 어딘가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자기 머리를 때렸다가, 비명을 질렀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가, 이윽고 남사추의 옷을 돌려주며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남사추는 그 모습에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몇 달 전에, 그러니까 금릉이 함께 야렵하지 않겠다고 통보 아닌 통보를 보내오기 전부터 금릉은 어딘가 이상했었다. 적어도 남사추가 보기에는 그랬다. 자신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유 없이 자기를 하루 종일 노려보기도 했었다. 혹 금공자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가까이 가면 헐레벌떡 도망가기까지. 거기다가 마지막으로 야렵했을 때 '다음에 또 봬요.'라고 인사하자마자 이젠 같이 다니지 않겠다 서신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역시 금공자는 내가 싫으신 건가. 지금만 봐도 그래. 내 옷도 싫어서 옷이 마르지 않으셨는데도 돌려주시고. 조금 거리가 가깝다 생각했더니 이젠 저 멀리까지 떨어져 앉아있다. 하아. 남사추가 답지않게 한숨을 쉬었다.

"금공자."

"어?! 응?! 왜?!"

깜짝 놀라 뛰어오를 기세인 금릉을 바라보다가 남사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금공자께서는 제가 싫으신가요?"

"....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뇨... 그저 금공자께서 제가 불편하신 것 같아서... 제가 뭔가 잘못했다면 말씀,"

"너 정말 바보야?!"

금릉이 벌떡 일어나서 남사추에게 삿대질을 했다. 갑작스레 욕을 먹은 남사추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바보! 바보 천치 얼간이! 금릉은 남사추를 가리킨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살면서 이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자기 외사숙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외사숙의 눈치를 빼다 박은 사람이 여기 있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애를 쓰면서 억누르고 아닌 척 고개 돌려왔던 마음이 뭐? 싫냐고? 내가 아무리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별 짓을 다했다지만 뭐라고?!

"평소의 사람을 살펴보는 마음씨는 어디로 갔어?!"

금릉이 씩씩대며 다가오자 남사추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는 당황하며 자기도 모르게 점점 뒤로 물러났다.

"금공자, 죄송해요. 우선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금릉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눈앞의 이 얄궂은 남자는 지금 내가 왜 화를 내는지도 몰랐다.

"도망가지 마!"

뒷걸음질 치는 남사추의 발걸음이 서러워 금릉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남사추도 얌전히 발을 멈췄다.

"왜 맨날 나한텐 사과만 해? 왜 나만 금공자야? 남경의도 구양자진도 자로 부르고 하물며 위무선도 공자라곤 안 부르면서!"

남사추는 순간 위선배나 위공자나 별 차이가 없지 않나 싶었지만 그 말을 꺼낼 때가 아님을 알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만 금공자고, 또래 중에 나한테만 존댓말이고, 맨날 나만 사과받고 나만, 나만! 그래서 일부러 나도 내 마음을 모른체한 건데! 인정하기 싫어서, 인정해봤자 좋을 게 없어서!"

금릉이 딱 한 뼘만큼 거리를 남겨두고 남사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금릉의 눈에는 어느새 맺힌 눈물이 반짝여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금릉은 그 사실이 분한 듯 눈을 벅벅 비벼 눈물을 닦곤 새빨개진 눈으로 남사추를 노려봤다.

"내가 널 싫어하냐고? 천만에!"

"...그럼요? 그럼 왜 그동안 절 피했어요?"

남사추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직도 몰라?! 이런 뜻이다!"

아까부터 쭉 눈에 거슬렸다. 아니 항상, 언제나, 옛날부터 이게 거슬렸었다. 위무선 덕분에 무슨 뜻인지 알게 된 이후로!

남사추의 말액을 잡은 금릉이 그대로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말액의 매듭이 풀어지고 남사추의 맨 이마가 드러났다. 남사추는 당황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으나 이미 말액은 풀려 금릉의 손에 잡혀있었다.

"...네 말액 나줘."

"금공자..."

"금공자라고 하지마!"

금릉이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말하자 결국 남사추가 손을 뻗었다.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녔다. 저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절로 나아갔다.

"금, 금여란 공자."

"싫어!"

"아릉."

남사추가 금릉의 손에 잡힌 말액을 다시 잡아당겼다. 말액을 놓지 않으려 손에 꽉 쥐고 있던 금릉이 그 반동으로 다리가 무너져 남사추 쪽으로 넘어졌다. 남사추는 그런 금릉을 지탱하며 조심히 입을 맞췄다. 접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행위였다. 두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금방 떨어졌다. 아마 몇 초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을 거다. 그 짧은 입맞춤에는 눈물의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아릉."

 다시 한번 남사추가 금릉의 이름을 불렀다.

 "이거면 돼요?"

"응...!"

금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사추를 꽉 끌어안았다.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처럼 불리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안 좋아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아닌 척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자신을 특별하게 불러줬으니까!

"그럼 아릉도, 저를.."

그때였다. 동굴 안쪽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익숙한 웃음소리였는데, 웃음소리라고 이해되지만 바람소리도 아니고 뱀 소리도 아닌 바로 그 소리였다!

서로 끌어안고 있던 두 소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여야 할 형체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사방 군데에서 메아리처럼 웃음소리가 울려와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뭐야! 어딨어!"

금릉이 짜증스럽게 외치자 반응하듯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멈췄어...?"

"아릉, 조심해요. 물이..!"

남사추가 급하게 말액으로 서로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손을 꽉 맞잡았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금릉이 남사추의 시선을 따라 동굴 입구를 봤다. 장막처럼 입구를 덮고 떨어져내리던 폭포 물이 갑자기 역류하여 동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휩쓸린다!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물이 쏟아져 들어와 둘은 그대로 그 물살에 휩쓸렸다. 그리고 동시에 혼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도와줬어! 도와줬어! 고맙지! 고맙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기뻐! 기뻐!"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한 말은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됐다. 강한 물살에 날아가면서도 동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남사추가 금릉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잘가! 잘가! 잘가!"

혼백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정신 차려!"

갑자기 뺨에 찾아오는 고통에 남사추와 금릉이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지 푸른 하늘과 우느라 얼굴이 엉망이 된 남경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남사추와 금릉이 동시에 묻자 남경의는 소매로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아내고 훌쩍이며 설명했다.

"너희 둘이 그렇게 물에 빠지고 혼백도 갑자기 사라졌어...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우선 신호탄을 쐈는데, 글쎄 신호탄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바로 머리 위에서 터지는 거야. 높은 곳에 가야겠다 싶어서 산봉우리로 돌아가서 신호탄을 쐈는데 마찬가지였어. 그동안 너네가 죽은 줄 알고..."

남경의가 크게 코먹는 소리를 냈다.

"엄청 걱정했는데, 애들이 마을로 내려가자고 해서 내려가고 있었거든. 근데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까 다시 혼백이 나타나서는, '안돼! 안돼! 기다려야 해! 그래야 친구! 착한 친구!'라고 말했어... 아니, 말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희가 떠내려간 강줄기를 따라서 찾아봤지..."

"그런데?"

금릉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남경의를 재촉했다.

"갑자기 지진이 나더니 너희가 강에서 솟아올랐어! 마치... 강이 너희를 토해낸 것처럼 퉤하고 튀어나왔어! 처음엔 시신일까 봐 걱정했는데 헝...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남경의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금릉과 남사추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걱정했지. 너도 고생 많았어."

남사추가 오히려 남경의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무서웠지? 하면서 달래주는 모습이 친구보다는 짐짓 엄마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혼백은 대체 뭐였을까?"

고소 남씨 문하생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누구 하나 답을을 내지 못했다. 혼백의 힘이 강력하여 쉽게 퇴치할 수 없어 보여 아이들은 결국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혹시 혼백이 또다시 방해를 할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마을 어귀에 도착할 때까지 그 괴이한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신호탄을 쏘자 그것 또한 하늘 높게 잘 보였다.

"이제 함광군이 오시길 기다리면 되겠군!"

"고소가 얼마나 먼데 그곳에서 이걸 보고 오시겠어? 운몽이 가까우니까 외숙이 먼저 올거야."

남경의가 이유 없이 뿌듯해하며 말하자 금릉이 어이없어하며 정정했다. 노란색 난릉 금씨의 신호탄이니 난릉 금씨의 수행자가 와야 했지만, 어쨌든 운몽 강씨 강종주의 은근한 과보호를 모르는 이는 없기에 다들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금릉, 강종주께서 오시면 오히려 더 혼나는 거 아니야?"

윽, 금릉이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충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인데! 외숙이면 보자마자 잔소리를 할게 뻔했고 그럼 물에 빠진 생쥐를 넘어서 물과 잔소리에 절여진 장아찌 같은 무언가가 될 거였다.

"그럴 리 없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면 돼."

금릉이 괜찮은 체 하며 말하자 남경의가 혀를 샐쭉 내밀었다.

"누구 좋으라고?"

어? 금릉을 흘기던 남경의가 무언가 발견하고 소리를 냈다.

"사추, 너 말액은? 어? 왜 둘이 그걸로 손목을 묶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경의가 소리치자 말액에 손목을 묶은 두 소년이 흠칫 놀라며 자신들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완전 까먹고 있었어! 금릉이 당황하며 무어라 변명하려 했다.

"그러니까 이건, 동굴에서 물에 빠질려길래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남사추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려서 금릉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그런 뜻이야."

뭐, 뭐??????

금릉을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던 대여섯 명의 소년들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거기서 뻔뻔하게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말액을 묶은 손을 번쩍 든 남사추 뿐이었는데, 정작 그도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소년들은 그 모습에 예전에 봤던 함광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금릉은 갑자기 화끈해진 남사추의 반응에 당황하는 중이었고 남경의와 다른 아이들은 그 둘을 번갈아보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들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을 차마 물어보기 두려워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 하는 거냐. 아릉?"

그때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외숙! 선자!"

돌아보자 그곳엔 강징과 다리털이 진흙으로 엉망이 된 선자가 있었다. 금릉이 물에 빠지고 남경의도 정신없어 보이니 직접 도움을 청하러 뛰쳐나갔던 모양이었다. 금릉은 선자에게로 달려가려다가 묶인 손목 때문에 어색하게 돌아와야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강징은 안 그래도 펴질 일 없는 미간을 더 구기더니 둘을 묶고 있는 말액을 노려봤다.

"꼴은 왜 그 모양이고?"

그 시선을 눈치챈 남사추가 주섬주섬 말액을 풀었고, 금릉은 딴청을 피우며 외숙의 질문을 무시했다.

"아릉! 대답하지 않으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매우 화가 난 강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때때로 변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네 꼴이 그런 게 말이 돼!"

"그냥 실수로 물에 빠졌을 뿐이라고요! 별일 없었다니까요! 그나저나 외숙은 연화오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예요!? 선자가 데리러 갔다는 건 분명 이번에도 몰래 뒤에서 훔쳐보고 있었던 거죠! 외숙 도움은 필요 없다니까요!"

방금 전에 외숙이 금방 와줄 거라며 자랑하던 모습은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금릉이 반항하며 대들었다.

"...너! 말본새가 왜 그 모양이야!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아릉!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말해! 위무선과 그.. 온녕과 같이 몰려다닐 때 어디 이상한 거에 물든 게냐? 그렇지 않고선..."

강징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전을 빼들었다. 자전의 보랏빛 전류가 파직 파직 피어오르자 아이들이 히익하는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금릉도 외숙이 자길 때리지 않을 거란건 알았지만 혹시 그가 화가 나서 남사추를 후려패버릴까 무서웠다.

"왜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하고 그러실까?"

그때 갑자기 위무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무선?! 네가 여길 어떻게..."

"나랑 남잠이 근처에서 야렵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신호탄이 보여서 남잠이 와봐야겠다고 했지 뭐야. 그치, 남잠?"

"응."

위무선이 옆에 서있는 남망기의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너..!"

강징이 못 볼 꼴을 본다는 듯 화를 내자 위무선이 더 남망기에게로 파고들었다. 남망기는 말릴 생각이 없었고, 그걸 지켜보는 이들만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근데 아릉이 무슨 짓을 했길래 날 닮았다고 하는 걸까?"

"널 닮았다고 한적 없어!"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강징을 뒤로하고 위무선은 금릉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인 건 둘째치고 당황하면서 시선을 피하는 게 분명 뭔가 숨기고 있었다. 위무선과 관련된 일이면 학을 떼는 강종주가 하필 자길 꼭 집어서 물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뭐가 있을까? 그는 금릉을 다 살펴보고는 금릉의 곁에 죄인처럼 서있는 남사추를 발견했다. 얘도 물에 홀딱 젖었네! 그리고 말액은 어디 갔담? 손에 들고 있군? 말액을 왜 손에 들고 있지? 손목이 빨간 게 뭘로 묶고 있기라도 했나 봐.

"말액으로 묶었구나!"

위무선이 남사추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아릉이랑 같이!"

아하! 위무선은 장난스럽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금릉의 어깨를 턱 잡았다.

"축하한다. 아릉. 드디어 너도 단수가 되었구나. 이 숙부는 기쁘단다."

"뭐라는 거야! 재수 없어!"

얼굴이 새빨개진 금릉이 눈을 꽉 감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위무선을 밀쳐냈다.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금릉이 부끄러워서 팔을 휘저으며 화를 내자 위무선은 무섭다는 척을 하며 남망기에게 다가가 안겼다. 에그머니나. 이래서 사춘기 소년들은 무섭다니까. 더 약오르라는 듯 말하는 그 목소리에 금릉은 결국 폭발해버렸다.

 "됐어! 몰라! 갈 거야!"

 금릉은 쿵쾅거리며 몇 걸음 걸어갔다가 이내 뒤를 돌아 남사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쭉 뻗으면서 잡으라는 듯 흔들었다.

 "아원! 이리 와."

 "...! 네! 아릉!"

 두 사람의 호칭에 강징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둘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손을 잡고 달려 도망가 버렸다.

 "이... 이 고소 남씨 놈들이!"

 "어이! 강징! 말은 똑바로 하라고! 사추를 데려간 건 아릉이란 말이야!"

 "시끄러워!"

 아직 철들지 않은 어른들의 대화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졌다.







검은? 강징이? 알아서? 찾아줬을거라네요? 혼백은 사랑의 산신령 같은 거였습니다. 

풍님 썰 훔쳐다가 썼음. 사금 귀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