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루키요] 선인장의 봄
15년도에 트위터에서 봇형식으로 연성했었던 걸 재정리 했습니다. 이사 전 티스토리에 옮긴적 있으며 사챈에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츠루→미카 베이스의 츠루키요
츠루마루의 일기형식으로 진행합니다.
2015.09.30 -> 2017.11.10 up
1.
선인장 가시에 찔렸다.
오늘은 주인에게 선물을 받았다. 선인장이라는 이름의 서양 식물이었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느낀 감상은 ‘기괴하다’였다. 꽃이 피기도 한다는데 도대체 이 가시 덩어리에서 어떻게 꽃이 핀다는 건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키우는 취미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곤란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그것을 받았다. 관심도 없고, 자신도 없고…. 그래서 마침 옆에 있던 그 아이에게 선인장을 넘겨줬다. 그 아이는 그걸 받아들곤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 무어라 내게 말했다. 뭐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인지.
다들 자러 갔을 시간인데 어쩐지 밖이 어수선하다. 그러고보니 이케다야로 출진이 있다고 들은 것도 같다. 야전 부대에 그 아이가 포함된 걸로 기억한다. 소식을 들은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가 주인에게 꽤 화를 냈던게 며칠 전이지. 그걸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퍽 눈물겨운 우정이라고 비웃었던가?
2.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불편하다. 음식도 섭취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하지, 마지막으로 잠을 취한지 벌써 40시간 가까이 지났다. 툭 치면 쓰러져 잠들 것만 같아 붓을 들었다. 혼마루의 모두가 잠들지 못한지 이틀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속 편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진 않았을 텐데.
이케다야로 출진했던 야전부대는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카슈 키요미츠의 부상이었다. 정말… 목이 덜렁거리는 채로 겨우 살아있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역겨웠다. 보름달을 보며 혼자 조용히 술을 홀짝이며 즐겼던 평온은 순식간에 끝이었다. 평온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치고 혼마루에 남은 건 울음소리뿐이었다. 소란에 깬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주인의 비명. 다른 이들의 비통한 한숨.
걱정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다른 이들의 머리 사이로 그 아이를 보았다. 들것에 눕혀져 수리실로 옮겨지는 모양새를 멍하니 눈에 담았다.
수리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몸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갈 셈이었는데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아이의 방 앞이었다. 뭔가에 홀린 게 틀림없지. 방문을 열었다. 문은 잠기지 않았다. 화장대 위엔 선인장이 곱게 올려져 있었다 화장대에 미세하게 쌓인 먼지를 손으로 훔쳐내며 생각했다. 예쁘게 꽃을 피워주겠다는 건, 자기 목이 꽃처럼 따일 거란 의미였나? 선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줄기에서 떨어진 꽃이 바닥에 뚝뚝 피를 흘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별안간 문이 열리더니 그 아이의 방으로 울어 얼굴이 엉망이 된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가 들어왔다. 그의 등 뒤로 비치는 햇살에 나는 그제야 해가 뜬 걸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 아이가 울면 저런 모습인가 궁금해졌다. 그와 그 아이는 다른 듯하면서도 얼굴이 많이 닮았었으니. 나는 멋대로 방에 들어온 것을 변명하지 않았고 그 또한 내게 묻지 않았다. 나는 그와 교대하듯이 방을 나왔다. 수리실 앞으로 돌아가자 곧이어 주인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 흐느끼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아이를 행방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우습지도 않지. 이런건 전혀 놀랍지 않다. 너무 뻔해서 역으로 지루했다. 죽어버릴 정도로 지루한 촌극이었다. 지금은 장례 준비가 한창이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에게 장례식이라니. 검도 저세상이 있을까?
3.
카슈 키요미츠가 부러졌다. 그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검은 죽어 시신을 남기지 않는다. 산산조각 나버린 쇳조각 몇 개가 그가 남긴 모든 것이었다. 주인은 혼마루 뒷산에 그걸 묻었다.
장례식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혼마루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다들 금세 털고 일어난 척 웃었다.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 마저 애처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 평화에 속이 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짜증이 난다. 왜 다들 웃는 거지?
4.
두 번째 카슈 키요미츠가 왔다. 지루해서 죽어버릴 거 같아.
5.
늦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산중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주인은 일어나지 않아 걱정했노라고 내게 말했다. 그 날 이후로 주인은 걱정이 많아졌다. 꿈을 꾸진 않았다. 아쉽지? 그래, 나도 기대하고 있었다. 내심 생각했었다. 그 아이가 꿈에 나타나선 ….
“저는 츠루마루 씨를….”
내가 미쳤지. 놀라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에 방금 순수하게 놀랐다.
6.
오늘의 난 비번이었고, 두 번째 카슈 키요미츠는 잃어버린 련도를 쌓으러 이와토오시와 함께 출진했었다. 아침 식사 때 주인의 목소리로 그걸 전해 듣는 것 외엔 오늘 나와 두 번째 아이와는 전혀 관련 없는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미카즈키의 방에 놀러가다 출진에서 돌아온 카슈 키요미츠를 만났다. 그가 현현하고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두 번째 카슈 키요미츠는 내가 생각과 달리 진짜 카슈 키요미츠였다. 목이 덜렁거리지도 않았고 눈동자 색 또한 같은 핏빛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모르는 카슈 키요미츠였다. 그 아이와 똑 닮은 얼굴로, 목소리로, 내게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두근거림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7.
미카즈키와 함께 원정을 다녀왔다.
가을이라 빨갛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웠다. 손을 잡고 산길을 발맞추어 걸었다. 계곡도 보았고, 꽃도 보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의 얼굴도 보았지. 태양의 입맞춤을 받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었다. 어이없는 사실을 하나 적는다. 전혀 설레지 않았다. 놀라웠다. 너도 놀랐니?
말해봐. 내게 무슨 짓을 했어? 무덤에 들어갈 때 내 심장도 같이 꺼내 갔나? 형체도 안 남고 사라지는 주제에. 인간도 아닌 주제에….
날….
날 좋아하는 주제에….
8.
두 번째는 내가 준 선인장에 별 관심 없어 보였다.
어떻게 똑같은 카슈 키요미츠인데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두 번째는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불쾌하다. 그가 이대로 계속 선인장을 방치한다면, 선인장은 그대로 시들어버리는 걸까? 그 아이의 목숨처럼?
9.
주인이 도검남사 전원에게 부적을 나눠줬다. 본체가 부러져도 수복되는 그 부적말이다. 하나만 해도 꽤 높은 값을 할텐데 한 사람당 하나씩 주는 걸 보면 꽤 저번 일이 충격이었나 보지.
미카즈키는 부적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 나도 따라 웃었던 것 같다. 어찌 그의 얼굴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정도로 미카즈키의 웃음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좋았다. 평소라면 그걸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을 텐데 오늘은 어째선지 기분이 나빴다. 이 조그만 파란색 주머니가 그 아이에게 있었더라면….
…이 감정은 미련인가?
부적에선 좋은 향기가 난다. 향긋한 꽃향기 같기도하고 설탕과자 같은 단내가 나기도 한다. 손 안에 꼭 쥐고 있노라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순수한 영력의 덩어리니까 도검남사에게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묘하게 말이야. 생각해봐. 그렇지? 이 부적이 있으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족쇄나 다름없잖아. 그 아이가 죽고…. 내 목에 족쇄가 채워진 거야.
10.
원정을 다녀왔다. 피곤해. 그리움이 눈꺼풀 안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부대 구성은 나와 이치고 히토후리, 나마즈오 토시로, 그리고 호네바미 토시로. 총 네명이었다. 무슨 기억상실 조합인지? 쯧. 대장을 맡았을 땐 구성을 듣고 혀를 찼다. 예전에는 저 기억을 잃은 불쌍한 형제들을 보며 마음을 삭히는 미카즈키를 동정했었다. 자기만 가지고 있는 추억이 추억인가? 혼자서 끌어안고 괜찮은 척 하는 게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딱 서니 미카즈키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란 걸 알았다. 지금 내 꼴이 그보다 더 우스웠다.
그 아이의 마음은 그 아이와 나만의 비밀이었다. 그럼 그 아이가 없는 지금, 그 마음은 누구의 비밀이지? 나의 비밀인가? 나는 그 아이의 비밀을 알았을 뿐 그게 내 것인 적은 없었다. 그럼 그 아이와 함께 그 마음도 사라졌을 텐데…. 나는 어째서…. 지금 이렇게, 이렇게까지……….
네가 보고싶어
11.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내가 사랑하는 경이로움의 연속이 아니라, 단순한 놀라움의 지속. 그 아이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놀라울 뿐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미련이 많은 남자인 줄 처음 알았다. 오늘 나는 미카즈키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깜짝 놀라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저 묵묵히 눈을 감았을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빌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기를.
미련으로 가득 찬 이 감정이 부디 사랑이 아니기를. 닿을 곳 없는 이 마음이 그 아이를 향한 게 아니길. 달을 끌어안고 귀신에게 빌었다. 원한다면 무덤 속이라도 따라갈테니, 부디. 내가 너를….
12.
내일 아침 일찍 출진한다. 잠이 안와.
13.
꼴사납게 왼팔이 날아갔다. 얼마나 깨끗하게 도려내졌냐면 고통보다 먼저 적의 실력에 감탄했을 정도다. 방심해서 그렇다곤 변명하지 않겠다. 절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한꺼번에 이렇게 피를 뿜어낼 수 있다니. 인간의 몸에 대해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팔을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기울고 미카즈키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불렀던 걸 기억해. 그 다음은 어둠이었다. 막연하게 무덤 속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었다. 별다를 것도 없었지. 그 순간 나는 한번 죽었었으니.
누워있는 동안 꿈을 꿨다. 마치 예전의 그날 같이 느껴졌다. 그 아이가 있었다. 두 번째가 아닌 그 아이가 있ᄋᅠᆻ다. 그는 수줍게 평소처럼 뺨을 붉게 물들이고 나에게 다가왔다. 두발자국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멈춰 서 내게 말했다.
“츠루마루 씨.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등 뒤에 감춰놨던 걸 꺼냈다.
“약속 했잖아요.”
꽃이 핀 선인장이었다. 꿈이 거품처럼 녹아내렸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에 누워있었다. 미카즈키가 내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츠루야-.”
애달픈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본능처럼 그를 끌어안아 달랬다. 미카즈키, 난 괜찮아. 여기 있잖아. 부적 덕에 살아났다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족쇄가 될 거라고. 내내 죽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기회가 됐으니 떠나곤 싶었다.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카즈키를 품에 안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눈동자처럼 붉디 붉은 꽃을. 카슈 키요미츠가 피워낸 사랑을.
14.
좀 더 쉬라는 주인의 말을 고사하고 내번을 맡았다. 내번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누워 있는 건 좀이 쑤셔서 못하겠다. 그리고 뭣보다 나는 확인하고 싶은게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난 두 번째의 방으로 갔다. 내가 갔을 때 방의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망설임 없이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확인했었다. 두 번째의 화장대 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된 그것을. 꽃봉오리가 맺히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 선인장을 보았다. 입안이 썼다.
"뭐야? 츠루마루 씨!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어느새 돌아온 두 번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날 방에서 쫓아냈다. 그 손을 뿌리치며 그의 목을 잡아채고 말했다. 너를. 죽이고 싶어.
"네?"
당황한 두 번째를 내팽개친 채로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선 달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이다.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 그 아이의 비밀은 나만이 알고 있었지만, 결코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비밀이 아니었었다. 하지만 그 선인장은 나였다. 그 아이에게 건네준 그것은 나였다.
15.
꼴사나운 영감이다.
계획되어 있던 출진에서 도망친 채로 방에 틀어박혔다. 무슨 일이니? 문 밖에서 들려오는 주인과 미카즈키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듣기 괴로웠다. 지루해서 영혼부터 죽어가게 내버려 둬….
16.
방에 스스로 갇힌 내가 그동안 뭘 생각했는 줄 알아? 삼 일 간 난 내가 가장 경멸하던 행동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침상에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떤 놀라움도 없이 그저 추억을 떠올리는 짓을 했다. 과거에 모든 걸 사로잡힌 할아범이 되었다. 추억?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일도 괜찮게 느껴진다는데 딱 그거로군. 추억이라고 부를 수 없는 기억이다. 나는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겪었던 주인들을 생각했고, 내가 지냈던 거처를 떠올렸다. 지금의 방은 언젠가의 무덤처럼 어둡고, 신사처럼 고요했고, 창고 안처럼 지루했다. 그런 방 안에서. 아주 오래전에 그랬듯이…. 시체 옆에 초야를 치르는 처녀처럼 수줍게 누웠던 그때처럼…. 그 아이의 시신 곁에 누웠다. 구토가 치미는 행동이었다. 네 시신을 상상했어. 그리고 그 곁에 누워서 너를 생각했어. 네 떨리는 손길이 조심스럽게 내 목을 매만졌을 때…. 내가 장난삼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니 방황하던 그 눈동자를…. 꽃을 피우겠다는 너의 목소리를….
밤늦게까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어떤 것도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이제 딱 하나 남아있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지금도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콱 죽어버릴까 생각하게 하는 건…. 꽃을 피울 수 없는 너와 나였다.
17.
어린아이는 좋아하지 않아.
죽다 살아나더니 이번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다. 한심하다고 해도 좋다. 무덤에서 기어 나와만 준다면 무슨 말이든지 들어주마.
전투는 안된다는 주인을 조르고 졸라 한동안 1부대로서 출진하게 되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야말로 최고로 마음이 평온한 시간이지. 살을 베고 뼈를 가를 때의 쾌락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의 근육이 움직이는 거에만 집중하면 다른 잡념이 사라진다.
평소에도 과격한 편이지만 오늘은 더한다고 부대장인 미카즈키가 한 소리 했다. 뭐 어때? 내가 죽어도 두 번째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올 텐데.
18.
최악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검으로 만들어지고 인간이 된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내 행동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래. 후회하고 있다. 어린애가 된 것 같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 며칠 나는 출진에만 매달렸다. 하루 종일 전장에서 뒹굴고 혼마루에선 잠만 잤다. 검을 쥐고 있지 않을 때면 빈손이 어색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언젠가 미카즈키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었다.
"요즘 너무 무모하구나. 조금 냉정해지는 편이 어떨까. 신중해지렴."
거기다 대고 나는 뭐라 답했더라. 걱정하지 마. 미카즈키. 내가 꼬마도 아니고. 나는 꼬마였다. 단도 아이들보다도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오래 살았을 뿐인 성격 더러운 애새끼. 미카즈키가 날 지키다 다쳤어. 창에 찔리겠구나 하는 순간 내 앞에 파란 가리기누가 흩날렸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미카즈키의 본체가 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미카즈키!!!”
초승달이 내 품으로 저물었다. 미카즈키가 토한 피를 뒤집어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지탱했다. 그의 눈 안에 새겨진 초승달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츠루야, 다친 곳은 없느냐…. 떨어지는 고개가, 죽어가는 달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기다려. 미카즈키. 너 마저 내 곁을 떠나면 안 돼. 수리실까지 미카즈키를 안고 달렸다. 사실 정확하게 기억나지가 않는다. 내가 비명처럼 외친 이름이 미카즈키인지, 어느 누군가인지. 수리실 앞을 지키고 앉아 있는 동안 현기증이 일었다. 그날이 얼마 전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피 냄새에 질식할 거 같았지. 온몸을 뒤덮은 미카즈키의 피 때문에…. 그래서…. 잠시 착각을 했다.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게 그 아이일 거라는 착각을…. 장지문에 머리를 쾅 소리 나게 박고 고백했다.
"사랑해. 그러니까…. 살아."
눈물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자꾸 어린애나 바랄 법한 게 떠올라. 죽어가는 미카즈키를 이용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날 위해 다친 그를 자기만족에 쓰기 전으로 가고 싶다. 그 아이가 살아있던 그ㄴㅏㄹ뭐야눈앞이이상해
19.
오늘 아침에 미카즈키가 드디어 눈을 떴다. 일주일 만이었다. 그리고 나는 노골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다. 죄책감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두려웠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웠다. 그가 특유의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츠루야,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하고 말하지 않길 원했다.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그가 어쩐지 내 고백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야. 미카즈키. 미안해.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었어. 저녁식사 후에 그는 나를 따라 내방으로 왔다. 양반도 못 되는 영감이지. 미카즈키는 그저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그리고 시답지 않은 말을 하며 웃었지.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나도 무사히 나았으니 잘 된 일이 아니겠니.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된다고 장담할 순 없으니…. 앞으론 무모한 점을 조금 고쳤으면 좋겠구나"
알았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즈키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불편해서 으깬 만쥬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러고 보니 오늘 나온 경단이 남던데 먹지 않았나?, 미카즈키는 쓸데없는 말을 한창 했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어야 했었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고 싶어. 내일 마저 이야기하지.”
"음…. 알겠다. 요양을 잘해서 힘이 넘쳐서 말이야. 이 할아범이 폐를 끼쳤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매에서 무언갈 꺼내 내게 주었다. 부적이었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한단다. 츠루야."
아. 그는 내 손을 그러쥐었고 나는, 어쨌더라 웃었는지. 울었는지…. 내 반응이 퍽이나 이상했는지 미카즈키는 금세 자리를 피해주었다. 내가 부끄러워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전혀 달랐다. 그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보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누가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 줘. 무덤 속이여 좋아, 신사여도 좋고, 주인이 누구든 신경 쓰지 않겠어 제발 이 인간의 몸을 얻기 전으로 되돌려줘.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저 하늘에 떠있는 아름다운 달. 나는 달밤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걸 기대했었다. 이제는 이루워지지 않는 꿈이지. 나는 저 달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거짓을 속삭여서 미카즈키의 눈을 가렸다. 시야가 계속 점멸했다. 누가 억지로 눈을 감기는 것처럼 앞이 검게 변했다가 제 색을 찾기를 반복했다. 이상한 생각이 나를 몰아붙였다. 오한과도 같은 감각이 발끝부터 나를 감쌌다. 불에 타오르는 감각이었다. 가만히 서있으면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등을 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걸음을 옮겼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그 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찬바람이 내 뺨을 차게 때렸을 때 겨우 발을 멈출 수 있었다. 혼마루와 멀리 떨어진 이름 없는 산이었다. 아-.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쓸어 올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 검은색이로군?
내가 바뀐 것처럼, 모두 바꿔버릴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바꾼다면 언제부터? 미카즈키를 이용하기 전? 그 아이가 죽기 전? 아니면…. 내가 사랑하기 전으로 할까.
20.
익숙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찾아온 이들이었다. 동시에 나를 죽이러 온 자들이었다. 산 밑에 작게 1부대의 깃발이 흩날리는 게 보였다. 내가 빠진 자리는 누가 차지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들을 맞이하러 분주하게 산을 내려갔다. 자, 큰 무대의 시작이다. 기다림은 잠깐이었다. 산 중턱에서 난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 반가운 나의 동료들! 그리운 얼굴을 한 명 한 명 둘러보던 나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왜 네가 여기 있어?
“돌아가요. 츠루마루 씨.”
카슈 키요미츠.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빨갛게 물든 손톱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길어 보였다. 그 손을 한번 보고 그의 눈을 보았다. 붉은 그 눈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쳐있었다. 그뿐이었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핫…. 돌아가다니 어디로?"
"혼마루로 가요. 주인이 원래대로 돌려줄 거예요."
"원래대로라.. 꽤나 달콤하게 들리는 조건이네"
그렇지만, 주인이 말하는 원래가 내가 말하는 원래는 조금 다를 테니까. 검을 고쳐 쥐었다. 카슈 키요 미츠가 내민 손을 거두고 검을 쥐려 하는 모습을 보았다. 기다려주지 않고 난 앞으로 튀어나갔다.
"츠루야!"
챙! 검과 검이 맞닿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보니 누군가와 검을 맞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동정으로 물러진 미카즈키의 검을 밀치고 옆구리를 노리는 검을 피했다.
"위험해. 위험해. 6:1이라니…. 일기토엔 별로 자신이 없는데 너무 한거 아닌가?"
"츠루마루 공이 순순히 그 검을 내려놓으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경어라니, 자네에겐 조금 놀라게 되는군!"
뒤에서 다가온 이에게 검을 던졌다. 푹-. 무언가 박히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달려가 검을 뽑고 다시 휘둘렀다. 누가 누군지 솔직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시야 끝에 계속 붉은색이 걸렸다. 피를 뒤집어썼다. 예전엔 피를 맞으면 홍백이 되었는데 이젠 검은색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하게 지냈던 이를 베는 것도 괜찮았다. 오히려 아무 느낌 없이 담담했다. 그렇군. 이런 놀라움이 있었군.
누군가의 팔을 베었고, 다른 누군가는 다리를 잘랐다. 또 누구는 배를 찔렀다. 그럴수록 점점 낯익은 이들이 낯설어졌다. 이 순간 나는 괴물이었다.
21.
고요해졌을 땐 나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왼쪽 팔꿈치는 부서졌고 오른쪽 다리는 부러졌는지 질질 끌렸다. 오른쪽 눈을 베어 시야가 어그러지기도 했다. 한계였다. 검에 달라붙은 피를 털어냈다. 우선 자리를 피해야지…. 1부대를 쓰러트렸지만 분명 지원군이 올 터였다. 쓰러진 이의 손을 무심하게 밟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어째서!!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뭘 위해서! 진심으로 섬긴 예전 주인이라도 있어? 지금 주인이 불만이야? 다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당신만 과거를 바꾸겠다고 이러는 거야!"
카슈 키요미츠가 소리쳤다. 그는 본체를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웠다. 진심을 다한 주인? 스쳐 지나간 이들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쪽은 단순한 과거일 뿐이었다. 내가 진심을 다한 건, 너뿐이었다. 그래. 너를 지키고 싶었다.
발악하는 어린 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떨리던 다리는 결국 힘이 풀렸는지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하나만 묻지. 너 그 선인장에 어떻게 생각해?"
카슈 키요미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선인장?"
"그럼 질문을 바꿀까?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요?"
"아주 중요한 거야. 틀에 박힌 물음만으론 놀라움이 부족하지 않겠어? 그럼 한번 더 묻지. 카슈 키요미츠. 츠루마루 쿠니나가를 어떻게 생각하지?"
"귀찮고…. 민폐야. 영문을 모르겠네요. 지금은 짜증나."
"하하하!!! 역시 그런가. 여전히 넌 놀라움이란 걸 모르는 녀석이구나. 그런 예상했던 대답을 내놓으면 재미가 없잖아. 귀찮고, 민폐에, 영문을 모르겠는 짜증 나는 녀석. 내가 아는 누구랑 똑같은데. 누군지 알겠어?"
"알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네가 모르는 사람이니까."카슈 키요미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장난에 놀아나는 게 기분이 안 좋은듯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쓰러트렸다. 그리고 그에게서 해를 가리듯 덮쳤다. 작구나, 여전히.
"뭘 위해서냐고 물었지. 널 위해서였다면 믿을 건가?"
아니지. 단순히 날 위해서다. 자기만족을 위한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은 이가 있어. 건방지고 귀찮은 애였다. 그리고 멋대로 죽었어.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야."
"죽었다니 그건…. "
무슨 말을 하려는 카슈 키요미츠의 입을 검지로 꾹 눌렀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곪아 버린 감정을 그저 토해내고 싶었다.
"우리 같은 존재도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굳이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지."
하아. 한숨을 뱉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아는 누구랑 더 닮아 보이니…. 선물을 주마. 나와 함께 성질이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본질은 같을 테니 아마 괜찮을 거야. 난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건 별로 변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조금 지쳐서 편한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함께 해줄 거지?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한순간이니까. 넌 잠깐 정돈 아파도 괜찮잖아.카슈 키요미츠의 입술 아래에 난 점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내 본체로 등을 꿰뚫었다.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멈추지 않고 쑤셔 넣어 그의 배까지 푹 찔러 넣었다.
기다려, 내가 간다. 나의…. 카슈 키요미츠에게.
어둠이다. 그대로, 끝.
22.
끝.
0.
바보 같은 감정의 반복이다. 얄궂게도 그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츠루마루 씨의 방을 정리하면서 그의 일기에 손을 댔다. 그의 감정의 쓰레기통을 들여다보았다. 종이에 스며든 먹이 모두 그의 어둠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를 사랑했었다. 나면서, 내가 아닌 존재를 사랑했었다.
"사랑"
입안에서 굴려본 그 단어는 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불쾌했다. 사랑은 전부 다 그와 같을지 궁금했다. 그의 사랑이 어쩌면 저주가 내 몸에 사라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다. 옷 위로 흉터가 있을 자리를 매만졌다. 그의 검이 꿰뚫었던 자리였다. 그와 함께 죽음을 맛보았던 그 흔적…. . 그것은 내가 부적으로 되살아난 순간에도, 주인의 수리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나에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일기를 집어 들었다.남겨진 방은 그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방이라기엔 너무나 휑했다.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먼지를 털며 창문을 열자 그가 보였다. 두 번째 츠루마루 쿠니나가였다. 두 번째 츠루마루 씨는 여전히 새하얗지만 내가 알던 그와 다르게 호탕하고, 밝고,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같은 검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윽!"
갑자기 흉터 부근이 아려왔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나? 함부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일기장을 처분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 방구석에서 시들어 있던 선인장을 일기장 옆에 놓았다. 화분과 선인장을 분리했다. 가시에 손을 잔뜩 찔렸지만 참았다. 불질러 없애버리려 했는데 불을 든 순간 숨이 턱 막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워버리기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조심히 일기장 위에 가시만 남은 선인장을 올려놓았다. 이 일기장과 선인장은 땅에 묻어야지. 그의 무덤을 만들 거다. 시신 따위 있을 리 없는 검의 무덤을. 내가 모르는 나의 비밀. 그의 비밀. 그리고 다시 나의 비밀. 전부 혼자서 짊어져야 했던 그 비밀들.
선인장에 꽃이 피는 날은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