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난무 드림커플
드림 사니와가 등장합니다.
이치고히토후리 x 이치노세 유즈루
1.
검들은 제 주인의 기분을 근시의 얼굴을 보고 판단했다. 꽃이 핀 걸 보고 봄이 온 것을 아는 것처럼, 빨갛게 부어오른 근시의 뺨을 보고 주인의 기분을 알았다. 자신들에겐 정원 호수에 핀 수국처럼 잔잔하고 상냥한 이가 근시에게만큼은 엄한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나쁠 때마다 근시의 뺨과 목 뒷덜미에 빨간 손자국이 남는다는 것을. 주인이 방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혼마루의 모두가 잘 알았다.
2.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며칠이 흘렀다. 근시의 부어오른 뺨이 가라앉지 않는 걸 보며 걱정하던 검들은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혼마루에 이방인이 찾아온 것이다. 정부의 감시관도 겨우 들이는 이 폐쇄적인 혼마루에 손님이, 그것도 여성으로. 온 혼마루가 숨을 죽였다.
3.
혼마루를 찾아온 소녀는 제 몸만큼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마중 나온 이는 있었으나 그녀를 도와주는 검은 없었다. 마중이라고 하기에도 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찾아온 이방인을 감시했다. 눈치를 줬다. 발을 들이기도 전에 도망가길 바라면서.
소녀는 그런 눈빛을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지 결국 대문을 넘어왔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눈이 투명했다.
"안녕하세요! 미노국 사니와 사쿠라(桜) 님의 혼마루에 견습으로 파견 나온 나츠시카(夏鹿)입니다. 앞으로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4.
쫓아내. 사니와의 개인실에서 나오기 전에 들은 명령을 상기한 이치고 히토후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뒤에 쫄랑쫄랑 따라오는 소녀를 명령대로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명은 거스를 수 없다. 자신의 주인은 그걸 알면서도 매번 이런 식이었다. 쫓아낼 수 없습니다. 당신을 이곳에서 쫓겨나게 하지 않으려면요. 사니와의 개인실에 나오기 전에 자신이 한말이었다.
5.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나츠시카님의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님은 옆방을 사용하시지요. 두 분은 이 별채에서 생활해주시길 바랍니다. 본채로 넘어오시는 건 주군의 명으로 금지되어있습니다. 식사는 따로 가져다 드릴 테니 식당에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식사를 가져오는 아이에게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아, 그리고 따로 진행될 수업 같은 건 없습니다. 주군께선 나츠시카님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는 검이니 당연히 알려드릴 수 없고요."
방을 안내한 이치고는 말을 마치고 인사했다. 어이없는 내용에 당연히 나츠시카는 반발하는 눈치였다.
"아니. 수업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저는 이곳에 사니와 업무를 배우러 왔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주군의 명이 있기에. 마에다, 두 분께 제가 설명해드린 것 외에 필요한 것들을 설명해주세요."
이치고는 설명을 요구하는 나츠시카를 내버려 두고 뒤를 돌았다. 뺨에 남은 손자국에 깎지를 끼는 것처럼,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6.
"마에다 토시로라고 합니다. 이치니를 대신해서 혼마루의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침 식사는 8시, 점심은…."
"그것보다."
내내 아무 말없이 천을 뒤집어쓰고 있던 야만바기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이 혼마루. 블랙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나츠시카가 눈을 번쩍 뜨며 야만바기리의 천을 살짝 붙잡았다.
"블랙? 블랙 혼마루라고 하는 그거?! 만바쨩,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무섭잖아."
"아까 이치고 히토후리라는 녀석의 얼굴. 너도 봤잖아. 사니와 가 아니어도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봤을 텐데. 손찌검 당한 게 틀림없잖아. 거기다가 너희 주인도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별채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나….."
"그만두세요!"
야만바기리의 말을 끊고 마에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정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마에다는 자신의 검집을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주군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시는 분은 설령 사니와님과 그 초기도 분이시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함과 억측에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치니가 그렇게 된 건 전부 당신들 때문인데…. 주군께서는 어떤 이보다 상냥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현세와 접촉하는 걸 극도로 꺼려하시는 분의 혼마루에 마음대로 침입하신 건 여러분이시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으셨더라면 주군께서도 이치니에게…!"
"마에다. 그만하세요. 너무 흥분했군요."
마에다를 뒤에서 안아올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소우자님…."
"함부로 주인의 이야기를 하는 건 금기입니다."
"…죄송합니다."
마에다는 고개를 숙였다.
"저에게 사과할 게 아닙니다. 주인께서 다시 밖으로 나오시면 그때 잘못을 고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당신들. 이것저것 호기심 갖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숨어있다가 정해진 기일을 채우고 사라지세요."
7.
무서운 얼굴을 한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츠시카는 자신의 초기도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조용히 훌쩍거렸다.
"만바쨩…. 나 뭐 잘못했던가…"
"……아니…. 내가 우츠시니까. 우츠시의 주인이라고 너를"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이 시점에는 '아무 잘못 없어.' 하고 멋있게 ㅁㅁㅁ처럼 대사를 날려주면서 위로해주길 바랐는데?! 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위로해줘야할 것 같잖아! 우츠시가 어때서! 만바쨩은 충분히 잘생기고 예쁘다고 계속 말했잖아!"
"………예쁘다고…. 하지마…."
"아니! 나를! 위로해달라고! 여기서 의기소침해져야하는건 나잖아!"
"………ㅁㅁㅁ이 누구야."
"응?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인데 완전 벤츠남이라서 보고있으면 설렌달까…."
"…………역시 내가 우츠시라서…."
"아! 제발!"
소녀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초기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방금 전엔 정말 울고 싶었는데 말다툼하니까 좀 나아졌나.
"헤헤…만바쨩…. 만바쨩은 정말 최고의 초기도야."
"……이랬다 저랬다."
8.
"주군. 들어가겠습니다."
이치고는 굳게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오지 마."
"실례를."
문을 열자마자 베개가 이치고를 향해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베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고집도 적당히 부리셔야 귀엽습니다."
이치고는 베개를 주워들고 방문을 닫았다. 침상에 다시 가지런히 놓아둔 뒤 헝클어진 유즈루의 머리를 정리했다.
"여자야?"
"네. 정부에서 보내온 자료대로."
"쫓아내."
"이미 방을 내줬습니다."
"누구 맘대로?! 여기는 내 혼마루야! 내가 주인이야!"
머리를 쓰다듬던 이치고의 손을 홱 내팽개쳤다.
"주군께서 나오시지 않았기에 근시로써 대리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오전에 저에게 일임하신 건 주군이시잖아요."
"그래도 쫓아내. 게이트는 열어줄 테니까 당장 쫓아내. 난 내 집에 남이 있는 게 싫어. 여자는 소름 끼치게 싫어."
"……그럴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왜? 그 여자 예뻐? 16살이었던가. 너 나도 그렇고 이 나이대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여장 따위 하는 기분 나쁜 남자 상대하다가 진짜 여자를 봐서 좋았어? 그래서 지금 내 말 안 듣는 거야?"
"주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유즈루는 대답 없이 이치고를 발로 찼다.
"꺼져! 너도 꺼져! 그 여자를 내쫓고 너도 도해 할거야"
9.
"…유즈루! 적당히 하라고 해!"
발길질하는 발목을 손으로 잡아 멈췄다.
"구석에 적당히 처박아 뒀으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그럴 때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죽여주길 바란답니다."
유즈루는 이치고를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 겁쟁이에, 위선자에요. 최악. 쓰레기. 네 동생들이 이런 점을 알아야 하는데."
"…말하지 마."
"말하지 않는답니다. 그대는 구질구질한 남자니까."
이치고는 유즈루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그대로 눕혔다. 자신의 목 위에 이치고의 손을 가지런히 올려둔 유즈루가 조용히 물었다.
"섹스할까요. 여보?"
"부러트려도 돼?"
"네. 당신의 마음대로."
10.
별채에서만 활동하라고 했지만, 별채는 본채와 이어져있었고 설명 없이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넓었다. 화장실을 가려 방을 나선 나츠시카는 길을 잃고 그대로 본채를 헤매고 있었다.
11.
이상야릇한 소리에 나츠시카는 그대로 발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지나온 복도는 방 안에서 검들이 떠느는 소리로 시끄럽고 문밖에 새어 나오는 빛이 있었는데 이 복도는 조용하고 불이 꺼져 어두컴컴했다.
"아, 이치, 고…. 아응…. 아."
12.
"유ㅈ…. 주군. 주무십니까?"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이치고는 문 밖의 소녀를 향해 말했다.
"거기 너. 꼼짝 말고 있어."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히익."
어둠 속에서 금색 눈동자가 빛났다.
"본채의 중심은 출입 금지라고 전했을 텐데."
"…그게…. 화장실을 찾다가 길을 잃어서…. ㄴ…넓네요…. 이곳은…..."
"쭉 가서 모퉁이를 돌아서 왼쪽이다. 그런 다음에 밖으로 나가서 정원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면 바로 별채다."
"가..감사합니다. 저기. 죄송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후다닥 달려나가는 소녀를 이치고가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것도 당연하지만."
"네? 네?!"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치고는 웃었다.
"저의 이런 추태도 부디 입을 다물어주시길. 남에게…., 특히 당신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치부인지라. 그럼 밤도 깊었는데 좋은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나츠시카의 눈앞에서 단호하게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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